‘발레 블랙노즈 터프팅공방’을 운영하는 윤정상씨가 수강생들 앞에서 제작 과정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
지난 25일 오전, 서울 마포구에 있는 ‘발레 블랙노즈 터프팅공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색색의 실뭉치들이 벽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앞에는 따뜻한 털실 느낌과는 이질적인 쇠 재질의 총처럼 생긴 도구가 놓여 있었다. 3㎏ 남짓 무게의 이 도구는 실을 캔버스 천에 박아 넣는 터프팅 작업에 쓰이는 ‘터프팅건’이다.
‘터프팅’(Tufting)은 실을 천에 박아 넣어 입체적인 무늬나 형태를 만드는 공예 기법이다. 여러개가 한데 모여 있는 느낌의 다발을 의미하는 터프트(Tuft)에서 파생된 말이다. 주로 러그(카펫)나 벽걸이 장식, 쿠션, 가방 등 따뜻한 느낌을 내는 소품을 만드는 데 쓰인다. 한 땀 한 땀 자수바늘로 털실을 꿰던 1990년대 인기 취미생활 ‘스킬 자수’가 이제는 터프팅이라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진화한 셈이다. 국내에 처음 알려진 때는 대략 5년 전이다. 붓이나 연필, 바늘처럼 기존 공예에 쓰이던 평범한 도구가 아닌 ‘총처럼 생긴 도구’인 ‘터프팅건’(Tufting Gun)을 쏴 작품을 만드는 이 취미생활이 요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다이내믹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역동적인 공예’로 인기다. 특히 묵직한 터프팅건을 붓처럼 다뤄가며 작업해야 하기에 남성들에게도 사랑받는 공예이기도 하다. 컵받침 같은 작은 소품은 3~4시간 정도면 완성되지만, 크기가 큰 러그는 사나흘 걸리기도 한다. 외국엔 이름난 터프팅 스튜디오나 아티스트가 많아 전시도 곧잘 열린다.
터프팅 공예를 취미로 삼은 이들은 자신의 취향대로 다채로운 형태의 작품을 만든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
직접 터프팅 작업을 해보기로 했다. 먼저 나무틀에 박아둔 커다란 캔버스 천 앞에 섰다. 아크릴 실뭉치 두개를 골라 와 터프팅건에 끼웠다. 터프팅건 바늘을 캔버스에 박아 넣은 채로 조심스럽게 방아쇠처럼 생긴 버튼을 누르자 ‘드르륵’ 진동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터프팅건의 반동을 최대한 눌러가면서 캔버스 천에 재봉질을 하듯 실을 박아 넣었다. 터프팅건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기울어지거나, 균일하게 힘 조절이 되지 않았을 때 실이 엉망으로 박히기 일쑤였다.
2년째 이 공방을 운영 중인 윤정상(35)씨는 터프팅 작업을 “따뜻함과 차가움, 터프함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취미생활”로 설명했다. 터프팅건이라는 거칠어 보이는 도구를 사용하지만 그 어떤 공예보다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잠깐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작품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터프팅건의 칼날에 손을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하겠다는 의욕이 앞서 너무 힘을 주면 캔버스 천이 찢어지기도 해요. 그렇다고 너무 힘을 빼면 실이 제대로 꿰어지지 않고, 방향도 어긋나버리죠. 온전히 집중해 나의 힘을 제대로 컨트롤하는 만큼 멋진 작품이 완성됩니다. 내가 호흡했던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결과물이 되는 것, 그게 터프팅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터프팅 공예를 취미로 삼은 이들은 자신의 취향대로 다채로운 형태의 작품을 만든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
덜어냄의 공예
터프팅 작업에 몰입하다 보면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연출자로 20여년을 바쁘게 살아왔던 엄현철(49)씨는 이런 터프팅의 매력에 푹 빠져 5년 전, 국내 처음으로 터프팅 공방을 차리기도 했다. “그땐 국내에 터프팅이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어요. 터프팅건도 파는 곳이 없어 외국에서 직구를 했죠. 집중해 터프팅을 하면서 오랜 고질병이었던 불면증을 고쳤어요. 평생 해온 일들과 다르게 결과물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큰 성취감이 생기더라고요.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면 평생 업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에 공방까지 차렸습니다.”
엄씨는 터프팅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덜어냄의 과정’을 강조한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무엇을 넣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낼지’ 먼저 고민하라고 말한다. 도안에서 불필요한 선을 지우고, 색을 줄이며, 형태를 단순화하는 과정이 바로 터프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욕심내서 복잡한 이미지를 구현하려다 보면 오히려 지저분해지기 쉽다는 게 엄씨의 설명이다.
“실이 생각보다 두껍기도 하고, 작업 면적에 한계가 있어 가져온 도안을 완벽히 구현할 수는 없어요. 과감하게 쳐낼 것은 쳐내고, 핵심적인 부분을 더 잘 살리려고 고민하면서 본질에 다가가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색이 드러나는 거죠.”
터프팅 공방엔 다양한 색과 굵기의 실이 비치돼 있다.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
내려놓기 연습
터프팅 작업은 ‘뒷면’이 진짜다. 터프팅건을 쏘는 작업 면은 결국 가려지고, 실제로 보이는 쪽은 그 반대편인 ‘완성 면’이다. 작업 중 약간의 실수가 있었더라도, 뒷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작은 기포 하나에도 굽다가 깨져버리기 쉬운 도자기 공예, 한 코만 빠져도 패턴이 틀어지는 뜨개질처럼 흠결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 섬세한 공예들과 달리, 터프팅은 창작자에게 훨씬 관대한 편이다.
방지원(35)씨는 터프팅의 이런 매력에 끌렀다. 직장생활을 하며 사소한 실수에도 예민했던 방씨는 터프팅을 배우며 완벽주의를 내려놓게 됐다. “터프팅을 처음 하던 날, 직선이 삐뚤어지고 도안을 벗어난 것 같아 ‘큰일이 났다’고 생각해 부랴부랴 뒷면을 봤는데 의외로 그럴싸하더라고요. 오히려 틀에 박힌 것보다 개성 있는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고요. ‘그 정도 흠은 별거 아니구나, 완벽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예쁘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불완전한 게 더 훌륭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된 거죠.”
몰입의 즐거움을 주는 터프팅 공예.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
방씨도 3년 전부터 공방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터프팅 작업에 빠져들었다. 터프팅을 체험하기 위해 오는 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한다. “선에서 벗어나도 괜찮다, 틀려도 된다고 말씀드리면 ‘꼭 심리치료를 받는 것 같다’며 고마워하시는 분도 있어요. 살면서 늘 완벽주의에 시달려왔다면서,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라면서요.”
이런 해방감 때문에 휴가 기간 힐링하듯 터프팅 작업을 하러 오는 직장인이 많다는 게 방씨의 설명이다. “직장에서는 내 성과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워낙 얽매여 있는 것들이 많잖아요. 여기서는 자유롭게 내 팔이 움직이는 대로 예쁜 결과물이 나오니 이 공방이 휴가지라고 찾아오시는 분이 많습니다.”
방씨는 최근 터프팅 작업을 보다 다양한 아이템으로 확장하는 데 관심을 쏟고 있다. 에스엔에스에 축구 선수 유니폼 뒷면이나 웨딩사진을 터프팅으로 만드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올려 65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평면적인 그림과 달리 실의 길이에 따라 현실적인 입체감도 줄 수 있어서 더욱 실감 나게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게 방씨가 느낀 터프팅의 매력이다.
터프팅 공방엔 다양한 색과 굵기의 실이 비치돼 있다. ‘발레 블랙노즈 터프팅공방’ 실내 풍경. 염서정 스튜디오 어댑터 |
터프팅은 실을 쏘아 박은 다음 하는 마무리 작업도 중요하다. 주로 클리퍼나 가위를 사용해 실의 높낮이를 다르게 해 입체감을 준다. “최근에 하회탈 모양을 입체적으로 만들었어요. 얼굴의 다른 부위는 1㎝ 길이로 다듬었는데 코만 6㎝ 정도로 높게 해 입체감을 표현했어요. 공방에 오시는 분들이 실제로 코를 만져보기도 하시죠. 감상하는 사람들 손에 작품의 촉감과 입체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어서 작가로서 행복한 마음이 듭니다. 가깝게 소통하는 게 기쁜 거죠.”
글 장선희 자유기고가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