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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주 팔 계획 없다더니'…투자자·금융당국 우롱하는 상장사

비즈워치 [비즈니스워치 백지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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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상 자사주 보유 상장사, 처분계획 공시 의무화
처분 예고한 회사는 3곳 뿐이지만 당국 감독은 미비
자사주 제도 개편 움직임 속 공시제도도 손질 필요


금융당국이 올해부터 도입한 자기주식(자사주) 공시제도가 실효성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회사가 매입한 자기주식(자사주)가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오용되는 것을 막고 일반주주를 보호한다는 취지로 도입한 제도다.

이 제도에 따라 발행주식총수의 5% 이상 자사주를 보유한 상장사는 보유 목적과 향후 계획을 사업보고서를 통해 공시해야 하지만, 실제 처분에 앞서 이를 제대로 예고한 기업은 극히 드물다.

여전히 상장사들이 대주주 경영권 강화 수단으로 자사주를 쓰고 있는 가운데 금융당국과 한국거래소에서도 제재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뒷짐을 지고 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와 함께 공시 제도 보완을 적극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자사주 처분 계획 미리 알리랬더니…단 '3곳'

올해 3월 31일 사업보고서 제출 마감 이후 7월 28일까지 공시된 보고서 중 임직원 보상·사내조합 출연·스톡옵션 행사 등을 제외하고 경영상 목적으로 자사주를 처분한 사례는 총 52건이다. 이 중 31건은 자사주를 5% 이상 보유한 상장사이고, 이들은 사업보고서에 사전 처분 계획을 공시해야 한다. 하지만 사전에 처분계획이 있다고 알린 기업은 3곳에 불과했다.

금융위원회가 작년말 개정, 올해 초 시행한 자본시장법 시행령과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증발공)에 따르면 올해부터 자사주를 5% 넘게 보유한 상장사는 자사주 보유 현황, 목적을 비롯해 향후 취득, 소각, 처분 계획을 이사회 승인을 받아 사업보고서에 공시해야한다. 자사주 취득이나 처분 등은 상장 주식 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데 비해 정보는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관련 공시를 강화한 것이다.

그러나 사업보고서에 '현재는 처분 계획이 없다'는 식으로만 기재한 후 돌연 자사주 매각에 나서는 일이 잇따랐다. 최대주주나 계열사를 대상으로 한 자사주 처분도 눈에 띄게 늘었다.


KPX홀딩스는 3월 13일 제출한 사업보고서에서 자사주(총발행주식의 6.95% 보유) 처분 계획이 없다고 알렸다. 그러나 한 달만인 4월 14일 이사회를 열어 최대주주 양준영 회장에게 자사주(1만7600주, 0.42%)를 매각하기는 결정을 공시한다. 양준영 회장은 개인회사인 CK엔터프라이즈 등을 통해 KPX홀딩스의 지분을 직간접적으로 보유하고 있는데, 이번 자사주 매매를 통해 11.8%에 불과한 지분율을 높였다. 다만 회사는 '자금확보와 주가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양 회장에게 자사주를 매각했다고 설명했다.

인지그룹 계열사인 싸이맥스인지디스플레, 인지컨트롤스도 역시 사업보고서를 통해 자사주 처분 계획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 회사는 7월11일 각자 이사회를 열어 계열사끼리 자사주 순환 처분을 결정했다. 인지디스플레는 싸이맥스에 자사주를 넘겼고, 싸이맥스는 최대주주 인지컨트롤스에 자사주를 처분했다. 인지컨트롤스는 최대주주 정구용 회장과 정 회장의 가족회사 유텍솔루션에 자사주를 팔았다.

세방하이비젼시스템은 7월 21일 자사주 상호 교환을 의결했다. 사업 협력 강화이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시장에선 최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양사의 우호세력 확보 목적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이들은 3월 제출한 사업보고서는 물론 5월에 제출한 분기보고서에도 모두 처분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2개월만에 입장을 바꾼 것이다.


마찬가지로 3월과 5월 정기보고서에서 자사주를 처분할 계획이 없다고 한 드림시큐리티는 7월28일 계열사 디지캡을 대상으로 보유한 자사주의 4분의 1을 처분하겠다고 공시했다. 목적은 '계열사간 협력 추진'이었다. 작년 말 디지캡에 자사주를 매각한데 이어 또 다시 주식을 넘긴 것이다. 드림시큐리티는 현재 자회사인 한국렌탈과 드림디엔에스를 통해 디지캡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 상장사들은 겉으로 '자금 확보'라는 목적을 내세웠으나, 시장에선 이들의 속내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계열사 등 우호세력에 넘기거나 자사주를 기반으로 교환사채를 발행함으로써 대주주 경영권 강화에 악용한다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소수주주 입장에선 주주가치 훼손을 의심케하는 대목이다. 엄수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자사주를 처분하는 상대방이 개인 최대주주 및 그 친인척이거나 계열회사인 경우, 자기주식이 대주주의 경영권 승계나 지배력 강화를 위한 편법으로 이용될 수 있다"며 "시가 대비 지나치게 비싸게 또는 저렴하게 매각하게 되면 자기주식을 매입해 주는 상대 회사나 자기주식을 처분하는 당해 회사의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감독당국도 제재 미온적…'제도 손질 필요'

이밖에도 △코리아나코스텍시스코아스템켐온코츠테크놀로지환인제약지엔씨에너지진양제약SKC 등 수많은 상장사들이 자사주 처분 계획이 없다고 했지만 1~2개월만에 입장을 바꿔 자사주 처분을 추진했다.

공시 의무가 있음에도 정기보고서에 자사주 운영 계획 내용을 아예 공개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KG에코솔루션제일바이오, 양지사 등은 보유 현황만 공시했을 뿐, 취득 및 처분·소각 등 운영계획은 알리지 않았다.

규정 강화가 무색하게도 자사주 제도가 여전히 소액주주 보호와 동떨어져 운영되고 있지만, 정작 금융당국은 미온적 태도다. 기업이 '경영상 이유'을 언급하거나 '사정 변경이 있다'고 설명할 경우 허위공시라고 보기 어렵다는 해명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황은 파악하고 있다"면서도 "회사 측에선 원래 처분계획이 없었지만 몇 주나 몇 개월 뒤 사업계획이나 재무상 필요에 의해 수요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 규정 위반을 적용하는게 실무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아울러 올해부터 자사주를 특정인에게 처분할 때는 처분 상대방과 그를 선정한 이유, 매각가격 산정근거, 예상되는 주식가치 희석효과을 기재하도록 의무화 했지만, 누락하는 사례도 다수 발생하고 있다. 이오테크닉스, 솔본은 발행 대상과 매각가격 산정근거, 희석효과 등을 공개하지 않아 정정을 거쳤다. SK이노베이션네이블, 코츠테크놀로지는 주식가치 희석효과를 누락했다. 공시를 했더라도 '주가에 별 다른 영향이 없다'는 기계적 문장만 나열한 경우가 대다수다.

그럼에도 거래소가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하거나 벌점을 부과한 사례는 아직까지 전무하다. 거래소 관계자는 "아직까진 적발한 사례는 없다"며 "시행 초기인만큼 서식 정리 등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당국이 자사주 처분 공시에 개입한 유일한 사례는 태광산업 뿐이다. 태광산업은 지난 5월 제출한 분기보고서에 자사주 처분 계획이 없다고 밝혔으나, 6월27일 이사회를 열고 교환사채(EB) 발행을 목적으로 한 자사주 처분을 의결했다. 보유 자사주 전량을 대상으로 삼으면서 주주가치 희석우려가 제기됐고, 결국 금감원은 발행대상 누락을 문제삼아 공식적으로 정정 명령을 내렸다. 현재는 2대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 측의 가처분 신청으로 발행이 중단된 상태다.

전문가들은 자사주 공시 위반에 대한 실효성 있는 규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사업보고서 자사주 처리계획 서식을 구체화하고, 만약 처분 계획이 없다고 했다가 처분을 진행하는 경우 어떤 사정변경이 있었는지 설명하도록 하는 등의 방식이 거론된다.

최근 정치권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자사주 소각 의무화'와 함께 논의 테이블에 올라 다뤄질 가능성도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자사주 소각 관련 상법 개정안 발의가 잇따르고 있다. 김현정 민주당 의원은 자사주를 취득 즉시 소각하도록 하는 강도 높은 개정안을 발의했고, 민병덕·김남국 민주당 의원은 1년 내 소각을 유예하는 안을 제출한 바 있다.

엄수진 연구원은 "불과 수개월 전 자사주 처분계획이 없다고 선언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특수관계인에게 처분하거나 자금조달에 이용하는 것은 소액주주 권익 보호와 동떨어진 행보"라며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이 무력화되지 않도록 불성실 공시에 대한 엄격한 감독이 필요해 보인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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