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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왼쪽)과 정동영 통일부장관. |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28일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첫 대남 담화에서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고 밝혔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 이후 50여 일간 군 대북 확성기 철거, 국정원의 TV·라디오 대북 방송 중단 등 유화책을 잇따라 내놓았지만 북한은 대화 가능성을 일축한 것이다. 그러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다음 달 예정된 한미 연합 연습을 조정하는 방안을 이재명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여정은 이날 ‘조·한(북남) 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담화에서, 올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김정은 초청 가능성이 한국 내에서 거론되는 것에 대해 “헛된 망상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남북 간 불신의 벽이 매우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면서도 “적대와 전쟁 없는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일관되게 취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임명장 수여식에서 김여정의 담화문에 대한 의견을 물으며 “평화적 분위기 안에서 남북의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정 장관은 이후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미 연합 연습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을지프리덤실드) 조정을 건의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그럴 생각이 있다”면서 이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29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실무조정회의가 열리는데 여기서도 이 문제가 주요하게 다뤄질 것”이라며, “연기와 축소 등 조정 방향에 관해선 회의 이후에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 장관은 ‘한미가 오랫동안 준비한 훈련이 불과 20여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조정이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정부의 의지에 따라 조정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주한 미군 등과 의견 충돌이 빚어질 수 있다’는 질문에는 “분명한 것은 이재명 정부의 정책 기조는 윤석열 정부와는 다르다는 것”이라며 “훈련의 기조도 윤석열 정부를 이어받지 않고 신중하게 하겠다”고 했다.
주한미군은 이날 정 장관의 훈련 조정 방침과 관련 본지의 질의에 “항상 그렇듯이, 동맹과 훈련 및 연습과 관련한 모든 결정은 기존 협의 절차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면서 “정 장관의 발언을 인지하고 있다”고 답했다. 주한미군 측은 통일부나 합참 측으로부터 을지프리덤실드 조정과 관련한 공식적인 입장은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담화에서 김여정은 “이재명 정부가 우리 관심을 끌기 위해 아무리 동족 흉내를 피워도 한국에 대한 우리의 대적 인식엔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한 관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역사의 시계 초침은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김여정은 “이재명 집권 50여 일만 조명해보더라도 긴장 완화, 관계 개선이요 하는 귀맛 좋은 장설만 늘어놓았지만, 한미 동맹에 대한 맹신 등은 선임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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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진경 |
북한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선언한 이후, 휴전선에 국경선 개념의 장벽을 쌓는 등 남북 단절 정책을 취해 왔다. ‘관계 복원’을 위한 이재명 정부의 유화 제스처에도 관계 단절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러시아 지원으로 여유가 생긴 만큼 김정은은 한국보다는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 주요 인사들은 그간 계기가 될 때마다 “북한이 APEC 회원국은 아니지만 ‘옵서버(참관) 자격’으로 초청될 수 있다”며 김정은의 방한 가능성을 언급했다. 정동영 장관은 지난 14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그런(김정은 초청) 국면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면서 “참석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속도를 내야 한다”고 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도 지난 22일 언론 인터뷰에서 “어떤 변수에도 (김정은 초청 가능성에)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또 분위기 조성을 위해 대북 전단 살포 차단, 군 대북 확성기·국정원 대북 방송 중단에 이어 최근엔 개별 북한 관광 허용 방안, 북한 만화·영화의 국내 유통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김여정은 이에 대해 “나름대로 기울이고 있는 ‘성의 있는 노력’”이라면서도 대북 방송에 대해선 “진작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로 평가받을 만한 일이 못 된다”고 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입장문에서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북 고위 당국자의 첫 대남 대화를 통해 표명된 북측 입장에 유의하고 있다”면서 “지난 몇 년간의 적대·대결 정책으로 인해 남북 간 불신의 벽이 매우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화 정착은 이재명 정부의 확고한 철학”이라고 했다. 홍용표 전 통일부 장관은 “대화에 매달리면 오히려 외면당하고 협상력도 잃는다”면서 “원칙과 기준을 갖고 국민 여론도 고려하며 대북 정책을 밀고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석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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