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ㆍ수면+경제학)'다. 침구부터 음료, 스마트기기까지, 수면을 돕는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만큼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건데, 특히 직장인의 '수면 부족'은 심각하다. 대한민국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살펴봤다.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는 숙면을 위한 소비 트렌드를 뜻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
# 퇴근 후 늦은 밤. 직장인 이유리(33)씨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침대에서 뒤척이길 반복한다. 몸은 피곤한데 잠을 잘 수 없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SNS 피드를 넘기기 시작한 게 밤 11시. '딱 5분만' 보려 했지만 어느새 두시간째다.
"요즘은 진짜 '자는 법'을 잊어버린 기분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스마트폰만 보다 보면 새벽 1~2시가 금방일 때가 잦죠." 유리씨는 최근 수면 패턴을 회복하기 위해 명상앱을 깔고,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까지 구입했다. "잠을 잘 자는 것도 이젠 사치처럼 느껴진다"는 유리씨만 그런 건 아니다.
# 직장인 박병헌(29)씨는 매일 새벽 3시께 잠이 든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집에 오면 밀린 것들이 쏟아져요. 저녁 식사, 업무 관련 자격증 공부, 운동까지. 저녁 9시부터가 제 '진짜 하루' 같아요."
문제는 그후에도 쉽게 잠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친 병헌씨는 생활 루틴을 바꾸기 위해 유튜브에서 추천한 '잠 잘오는 음료'를 구입했다. 신통한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셔보기로 했다. "예전엔 '자는 시간'을 아까워했는데, 지금은 잠 못 자는 시간이 더 아까워요."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 이런저런 이유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이 늘면서 새롭게 나타난 시대적 현상이다. 수면(Sleep)과 경제학(Economics)의 합성어인 슬리포노믹스는 숙면을 위한 소비 트렌드를 뜻한다.
슬리포노믹스의 규모는 이미 상당하다. 한국수면산업협회에 따르면, 2011년 4800억원 수준이던 국내 수면 관련 시장 규모는 2022년 3조원으로 6.25배가 됐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앤드마케츠는 2030년 세계 슬리포노믹스 시장이 153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숙면을 돕는 상품도 줄줄이 쏟아지고 있다. hy는 2023년 수면에 도움을 주는 기능성 원료를 넣은 음료 '수면케어 쉼'을 내놓았는데, 출시 6개월 만에 1700만병을 팔았다. 현재까지 누적 판매량은 3000만개에 달한다
직장인의 수면 부족은, 단순한 습관 이상의 구조적 요인과 맞닿아 있다.[사진|뉴시스] |
수면 아이템을 신사업으로 밀고 있는 화장품 업체도 적지 않다. 아모레퍼시픽은 2022년 8월 수면 건강 기능 식품 '굿슬립가바365'를 젊은층이 주로 찾는 올리브영ㆍ카카오톡 선물하기 등에 입점했다. 누적 판매량은 15만개를 돌파했다.
국내 주요 가전업체도 신제품에 '수준 높은 수면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 최근 사전판매를 시작한 갤럭시 워치8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기존엔 램수면(REM) 등 수면의 질質을 사후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시리즈엔 사용자의 생체 리듬(생체시계)을 기반으로 최적의 수면 시간과 수면량을 제안하는 기능까지 넣었다.
이렇게 '슬리포노믹스'가 떠오른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잠 못 자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슬리포노믹스 시장이 커지는 '웃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못 잘까. 대한수면연구학회가 발표한 '2024년 한국인의 수면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면 시간은 6시간 58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8시간 27분)보다 1시간 29분이나 부족했다.
매일 숙면을 취한다는 응답자는 7.0%로, 글로벌 평균(13.0%)의 절반에 그쳤다. 수면 장애나 불면증으로 진료받은 환자도 2010년 27만8000명에서 최근 67만8000명으로 2.4배가 됐다.
특히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진 직장인의 '수면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다. 사례로 든 유리씨, 병헌씨처럼 말이다. 2023년 11월 HR테크기업 인크루트가 직장인 88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직장인의 수면시간과 질'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보자.
한국 직장인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4~6시간(56.3%)'이 가장 많았다. 이상적인 수면 시간을 묻는 질문에는 10명 중 8명(79.7%)이 '7~9시간'이 적당하다고 답했다. '현재 수면 시간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8.8%로 절반을 넘었고, '수면의 질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응답도 58.3%에 달했다.
그렇다면 직장인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수면을 방해하는 요소로는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 카페인 섭취, 불규칙한 수면 습관 등이 꼽힌다. 누군가는 '생활 습관을 고치면 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나쁜 수면'의 원인은 직장 내 긴장감, 업무 스트레스 등 구조적 요인들과 맞닿아 있다.
이준희 서울성모병원(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최근 직장 내 스트레스와 갈등, 업무 압박 등으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직장인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과도한 업무 부담이나 조직 내 긴장감이 지속될 경우, 불면증은 물론이고 만성우울이나 불안장애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곽금주 서울대(심리학) 교수 역시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경쟁 강도가 높고, 특히 직장엔 여전히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남아 있다"며 "직장인의 경우 스트레스와 불안을 해소할 통로가 마땅치 않다 보니 유튜브 쇼츠 등에 의존하게 되고, 이같은 습관이 수면 방해 요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직장인의 수면 부족 문제는 개인을 넘어 일터와 사회의 구조적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거다. 곽 교수는 "직장인들이 커피를 늘 곁에 두는 모습만 봐도 한국 사회는 잠을 '줄여야 할 대상'임이 확실하다"며 "수면을 소홀히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하나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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