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정 조각가가 은빛 원통형 조각 ‘낯선 자의 은신처’ 사이에 서 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신작 연작이다. /고운호 기자 |
높이 3.5m에 달하는 은빛 원통형 조각이 1층 전시장 입구에 서 있다. 두 다리의 간격 때문일까. 마치 어딘가로 걷고 있는 인간 모습 같다. 뒤쪽에 나란히 세워진 조각 세 점도 합쳐놓고 보니 팔을 쭉 뻗은 인간 형상이다. 모두 원로 조각가 엄태정(87)이 알루미늄으로 만든 신작이다.
1층에 전시된 알루미늄 신작. 왼쪽은 '낯선자의 은신처-티탄의 은빛 베일-철인은 하늘을 걷는다'(2025). 92×88×350(h)cm. 오른쪽 세 점은 '낯선자의 은신처-은빛 베일 출현 I, 출현 II, 출현 III'(2025). /아라리오갤러리 |
한국 1세대 추상 조각을 대표하는 작가 엄태정이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를 열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한 장소에 조각을 놓는 것은 그 장소에 하나의 세계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옛날 마을 어귀에 솟대를 세우면, 솟대가 동네를 지키는 수호신이 됐습니다. 솟대 자체가 마법을 지니는 거죠. 하나의 조각이 세워지면 그 안에 내재된 마법 같은 힘이 기존 공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는 거예요.” 전시 제목은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에서 따왔다.
엄태정 조각가가 은빛 원통형 조각 ‘낯선 자의 은신처’ 사이에 서 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신작 연작이다. /고운호 기자 |
엄태정은 1960년대 서울대 재학 시절 철의 물성에 매료돼 금속 조각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대 조소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독일 베를린 게오르그 콜베 미술관, 성곡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서울 올림픽공원, 베를린 총리공관, 크로아티아 두브로바 조각공원 등 국내외 주요 공공장소에 작품이 설치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대법원 중앙정원에 우뚝 서 있는 1995년작 ‘법과 정의의 상(像)’. /조선일보 DB |
서울 서초동 대법원 중앙정원에 우뚝 서 있는 조각이 그가 1995년 제작한 ‘법과 정의의 상(像)’이다. 커다란 두 개의 원을 십자(十字)로 교차시킨 형태의 청동상이다. 엄태정은 “요즘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오는 그 작품에 내 조각 인생의 총체적인 조형 언어가 집약돼 있다”며 “외곽 원은 수직 상승 구도를 통해 법의 엄격성과 존엄성을 나타내고, 내부 반원의 수평 구조는 법의 형평성과 보호를 상징한다”고 했다.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 전시장에서 만난 1세대 추상 조각가 엄태정. /고운호 기자 |
다양한 금속의 물성과 재료 실험을 계속해왔다. 1970년대 중반에는 부드러운 구리로 재료를 전환했고, 2000년대 들어 만난 알루미늄은 새로운 창작 욕구를 끓게 했다. 그는 “이 은은하고 시적인 재료가 예순 넘은 내게 조각가로서 새 장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며 “가볍게 보이지만 경박하지 않은 알루미늄을 통해 ‘비어 있으나 차 있는’ 상태를 구현하고 있다”고 했다.
엄태정, '1000개의 찬란한-막고굴 시대II'. 2025, Copper, 50x50×121(h)cm. /아라리오갤러리 |
엄태정, '만다라-법열-무한주'. 2025, Acrylic on canvas, 145×145cm. /아라리오갤러리 |
이번 전시엔 조각, 회화, 드로잉 등 27점이 나왔다. 1층을 채운 알루미늄 신작과 함께 지하 전시장엔 중국 둔황의 막고굴에서 영감받은 신작이 전시됐다. 붉은 구리로 만든 직육면체를 쌓거나 이어붙여 수행자들의 영적인 에너지를 형상화했다. 그간 소개되지 않았던 1970~1990년대 작품도 볼 수 있다. 평면 회화 작업인 ‘만다라’ 연작은 그가 “내 조각의 아버지”라고 칭하는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작품 ‘무한주’에 대한 오마주다. 가로×세로 1㎝ 크기의 정사각형을 대형 평면 위에 수행하듯 그려 넣으며 완성한 작품이다. 전시는 8월 2일까지. 무료.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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