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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하구 ‘철새의 섬’ 근현대미술이 꽃피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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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마의 핵심 작품으로 전시장 중간 영역에 잇따라 내걸린 대형회화 10점(1907). 인간의 탄생과 유년기, 청장년기, 노년기 단계를 각기 다른 색조 아래 원과, 나선, 꽃 모양을 한 추상적 기운들의 흐름 이미지로 표현했다.

힐마의 핵심 작품으로 전시장 중간 영역에 잇따라 내걸린 대형회화 10점(1907). 인간의 탄생과 유년기, 청장년기, 노년기 단계를 각기 다른 색조 아래 원과, 나선, 꽃 모양을 한 추상적 기운들의 흐름 이미지로 표현했다.


갈대숲 너머로 하늘과 강, 바다가 잇닿은 시원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부산 낙동강 하구의 철새 도래지 을숙도에 가면 누리는 조망의 특권이다. 폭염으로 울렁거리는 올여름, 이곳에서 또다른 볼거리가 기다린다. 을숙도 한가운데 자리한 부산현대미술관이 다르게 보기를 권하는 국내외 근현대미술의 서늘한 난장을 펼치는 중이다. 신의 영매이자 무당을 자처했으며 서구에서 처음 추상회화를 그린 이로 뒤늦게 복권되면서 세계 미술판의 각별한 눈길을 받고 있는 스웨덴 출신의 여성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의 한국 첫 회고전과, 흔히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감각으로 비장애인의 무딘 감각을 새롭게 깨워주는 벽깨기 미술품 모음 난장을 함께 벌여놓았다. 지금 시대 한국에서 자본과 노동의 풍경을 아크릴 조각들로 단박에 갈무리한 진격의 조형물도 버티고 있다.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스웨덴 여성화가 힐마 클린트 회고전 전시장 내부.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스웨덴 여성화가 힐마 클린트 회고전 전시장 내부.


2층 공간에 7개 장면으로 펼쳐진 힐마의 전시는 작품의 면면이나 보존 상태, 전시 구성 등에서 일반적인 서구 거장 전시의 정형과 크게 다르다. 정규미술 교육을 받고 수의학연구소에서 해부용으로 나온 동물 사체와 식물 등을 정밀하게 그리는 세밀화 작업을 했던 힐마는 여동생 헤르미나의 죽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영적 세계와 보이지 않는 자연 형상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다른 여성 작가들과 5인회를 결성해 신의 계시를 화폭에 옮기는 영매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선과 자연 형상의 모티브를 바탕으로 한 특유의 추상회화를 개척한다. 지금까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알려진 러시아 출신의 바실리 칸딘스키, 네덜란드 기하추상의 대가 피트 몬드리안, 러시아 절대주의자 말레비치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지만, 1905년 가장 먼저 추상을 그린 그의 성취는 1986년 미국 라크마(LACMA) 전시에 나오면서 처음 알려졌고, 2018년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에 관객 60만명이 몰리고 영국 테이트모던도 따로 순회전을 마련하는가 하면 영화로도 제작되면서 선풍을 일으켰다. 이번 전시 또한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을 거쳐 찾아온 아시아 순회전의 일환이다.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스웨덴 여성화가 힐마 클린트 회고전 전시장 내부.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스웨덴 여성화가 힐마 클린트 회고전 전시장 내부.


‘대면’ ‘상징의 미로’ ‘보이지 않는 세계’ 등 인상적 제목이 각각 붙은 7개 전시 공간은 쉽게 불가사의한 작가 화력의 변모 과정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친과 자연 풍경을 그린 19세기 말 작품으로 시작하는 전시장은 1900~1910년대 초창기의 구상, 반구상, 추상그림들을 실견할 수 있는데 알려진 거장들과 명확히 다른 유연한 선과 모호한 색감의 번짐, 면 분할 등에서 뚜렷한 개성을 표출한다. 여러 개의 격벽을 둘러놓은 전시장에서 처음 그의 연보 연대를 적은 도입부는 좁은 가로길 같지만, 이후 확 트인 공간들로 넓어지면서 그의 경이로운 화력들을 펼쳐놓는다. 그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자연과 사물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시작해 나선과 삼각형, 원의 기하학적 이미지, 뇌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식물의 덩어리로 전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세번째 전시 공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대표 연작인 ‘신전을 위한 회화’와 네번째 전시 공간 ‘단순한 침묵’의 ‘원자’, ‘무제’ 등의 주요 연작들이 회화적 진화와 사유의 전개 과정을 잘 보여준다. 말년인 1930~40년대에는 다시 세밀한 구상 소묘와, 밀도감 높은 수채화로 돌아가는 과정이 연대기적으로 풀려나온다. 아울러 죽기 전까지 자신의 과거 추상 작업의 전모를 2만장 넘는 일종의 그림 노트에 세심한 설명글과 작게 축약한 사진 또는 소품 그림을 붙여 정리한 모습들도 아울러 볼 수 있다. 현대미술관의 성격에 맞게 공간을 가른 격벽 사이에 시원하게 가로세로로 넓은 통창 식의 시선 통로를 내어 초창기와 후반부, 중반부의 작업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면서 작가 작업의 다층적 성격을 실감할 수 있도록 얼개를 만든 것은 이번 전시에서 돋보이는 장점이다. 10월26일까지.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 1층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열개의 눈’ 전시장 내부.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 1층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열개의 눈’ 전시장 내부.


지난 5월 개막한 1층 기획전 ‘열개의 눈’(10월19일까지)은 시각 기능이 약하거나 다른 감각으로 시각적 기능을 대체해서 보고 이해하는 장애인의 감각이 비장애인의 감각과는 다른 아름다움의 경지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국내외 장애 비장애 예술가 20명이 수년간 함께 하면서 구상한 프로젝트를 실현한 결과물이 시각예술, 웹툰, 퍼포먼스, 사운드아트,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70점으로 전시장에 나왔다. 캐나다 출신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작업 중인 라파엘 드 그루트는 눈을 가린 채 부산 거리에서 긁어모은 밧줄과 버려진 잡동사니 등을 온몸에 걸친 채 위태롭게 사다리에서 내려오고 걸어가는 개막 동영상과 몸에 걸쳤던 잡동사니들을 그대로 전시해놓았다.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 1층에서 진행중인 ‘열개의 눈’ 개막 동영상. 캐나다 출신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작업 중인 라파엘 드 그루트는 눈을 가린 채 부산 거리에서 긁어모은 밧줄과 버려진 잡동사니 등을 온몸에 걸친 채 위태롭게 사다리에서 내려오고 걸어가는 동영상과 몸에 걸쳤던 잡동사니들을 전시해놓았다.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 1층에서 진행중인 ‘열개의 눈’ 개막 동영상. 캐나다 출신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작업 중인 라파엘 드 그루트는 눈을 가린 채 부산 거리에서 긁어모은 밧줄과 버려진 잡동사니 등을 온몸에 걸친 채 위태롭게 사다리에서 내려오고 걸어가는 동영상과 몸에 걸쳤던 잡동사니들을 전시해놓았다.


눈동자 조형물을 망원경 속에 집어넣어 시각에 내포된 양가적인 의미를 드러낸 엄정순 작가의 작품과 뇌출혈 이후 왼손만으로 식사할 수 있는 특제 수저를 만든 듀오 라움콘의 신작, 보지 못하고 촉각으로 기억하는 자기 가족들의 몸 이미지 덩어리를 빚어내놓은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의 작품들이 잔잔한 감동과 성찰을 이끌어낸다. 지하 소장품 섬에 놓인 권은비 작가의 조형물 ‘노동의 지형학―12개의 장면들’은 가시화되지 못한 이 시대 노동의 실체를 아크릴로 재현한 전태일 열사 불꽃 분신 상과 여러 노동 참사를 상징하는 숫자 기호들의 조합 상이 오르내리는 키네틱 설치물의 얼개로 표현했다. 묵직한 이 시대의 노동 화두를 가볍고 투명한 재료와 작동 방식으로 풀어낸 이 개념적인 작품은 형식과 내용의 기묘한 조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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