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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안무를 창작한 댄서 리정 [더블랙레이블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유 아 마이 소다 팝, 마이 리틀 소다 팝!”
모두가 ‘어깨춤’을 췄다. 헌트릭스 매니저처럼 조금 얄궂은 표정을 짓는다면 금상첨화. 정작 안무가 리정은 “어깨춤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 세계를 사로잡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속 인기 보이그룹 사자보이즈가 부른 ‘소다 팝’(Soda Pop)의 안무다. ‘소다 팝’은 더블랙레이블 소속으로 블랙핑크 트와이스 선미 전소미 NCT드림 등 내로라하는 K-팝그룹의 안무를 창작한 리정을 통해 태어났다. ‘소다 팝’은 ‘악령돌’ 사자보이즈에게 ‘청량돌’ 이미지를 각인한 곡이다.
최근 서울 용산구에서 만난 리정(27)은 “3년 전 ‘케이팝 데몬 헌터스’ 측의 연락을 받아 기획 초반부터 안무 창작에 참여했다”며 “(케데헌은) 처음부터 잘 될 줄 알았다. 예술의 분야에서 진심은 통한다고 믿기에 사활을 걸고 (안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리정을 대중에게 각인한 엠넷 경연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첫 시즌을 본 ‘케데헌’ 제작진이 그에게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안무를 맡기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가 참여한 안무는 두 곡이다. 블랙핑크를 연상케 하는 헌트릭스의 ‘하우 잇츠 던’(How It’s Done)과 사자보이즈의 ‘소다 팝’(Soda Pop). 이 두 곡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상위권에 진입하며 세계적 인기를 모으고 있다.
“창작의 경로는 생각보다 별것 없어요.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게 의외로 메가 히트를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소다 팝’은 신기하게도 듣자마자 (어깨춤이) 생각났어요.”
‘소다 팝’의 리듬엔 ‘어깨 춤’ 안무가 좋겠다는 창작자의 감각은 여지없이 통했다. 숏폼 챌린지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가상 아이돌의 춤을 제로베이스원·플레이브·라이즈 등 K-팝 그룹들이다. 사자보이즈의 리더인 진우의 모델이 된 차은우 역시 마찬가지다.
리정은 “많은 그룹이 ‘소다 팝’을 췄지만, 가장 와닿은 건 차은우”라며 “진우가 차은우를 참고해 만든 캐릭터이다 보니, 춤추는 모습이 너무나 진우 같았다. 진우가 살아있다면 저럴 것 같았다”며 감탄했다. 전 세계가 인정한 ‘넘사벽’ 외모가 가산점을 준 건 아니라고 리정은 귀띔했다. 그는 “표정은 춤의 완성에 포함되나, 얼굴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물론 예쁘고 잘생기면 좋을 것”이라며 웃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안무는 리정이 창작자로의 이상을 마음껏 펼치는 계기가 됐다. 이 작품엔 같은 소속사인 테디를 필두로 한 더블랙레이블 프로듀서가 대거 합류했다. 리정은 “음악이 안무를 만드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영감의 원천”이라며 “더블랙레이블의 프로듀서가 OST를 만든다면 음악성은 보장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음악에 안무를 할 수 있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했다.
실체가 없는 가상 아이돌의 안무를 짠다는 것은 기존 K-팝 안무와는 다른 일이었다. 그는 “제작진이 ‘하우 잇츠 던’의 노래와 스케치를 보여주며 헌트릭스 멤버 한명 한명 소개해 줬다. ‘이들에게 물리적 한계는 없으니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는 말을 듣고 감격했다”고 말했다.
리정은 안무는 물론 ‘케데헌’의 인기를 겨냥한 헌트릭스 루미와 사자보이즈 진우의 모션 캡쳐도 맡았다. 모션 캡처는 가상 캐릭터의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실제 인간의 동작을 디지털 정보로 기록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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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안무를 창작한 댄서 리정 [더블랙레이블 제공] |
“전 안무를 두 번 정도 하면 지치는데, 헌트릭스는 체력적 한계도 없어 뭐든지 할 수 있었어요.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안무를 짜며 실제 그룹을 안무의 모티브로 삼지는 않았어요. 제게 가장 좋은 영감은 좋은 음악이애요. 음악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제 꿈을 펼쳤어요.”
리정은 2018년, 고작 스무살에 휘인의 ‘이지(EASY)’를 시작으로 업계에 입성, K-팝 퍼포먼스의 성장을 함께했다. 그간 안무가와 댄서는 늘 K-팝 그룹의 뒤에 있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팬덤은 어느샌가 ‘리정의 안무’를 발견하고 ‘리정 스타일’을 익힌다.
그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은 정말 꿈만 같고, 기적 같다”며 “안무 창작이야 언제나 할 수 있지만, 안무를 누가 만들었는지까지 알아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얼굴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4년 전 ‘스트릿 우먼 파이터’였다. 당당한 자신감으로 ‘어린 나이’를 공격하는 다른 팀 리더에게 “본인은 스물네 살에 뭐하셨는데요?”라는 희대의 유행어를 남기며 ‘젠지’ 세대의 아이콘이 됐다. 리정은 “‘스우파’ 이전에도 난 꿈이 크고 야망이 큰 사람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성장하리라고) 예측해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지난 22일 종영한 국가 대항 춤 경연 프로그램 ‘월드 오브 스트릿 우먼 파이터’엔 한국 대표팀 ‘범접’의 멤버로 참여, 소위 ‘리정 바이브’로 경쟁팀 댄서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은 없다. 파이널에 가지 못했다는 것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며 “등수를 떠나 좋은 발전과 성장을 줬기에 (성적)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스우파’의 인기 이후 K-팝 퍼포먼스를 이끄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안무가, 댄서라는 직업이 가진 고유의 성질을 지키는 선에서 더 많은 기회를 만들고 싶다”며 “춤이 데리고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어디까지라도 가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근 가요계의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안무 저작권에 대해서도 그는“창작자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라며 “선배, 동료, 후배들과 함께 오래 걸리더라도 잘 닦아나가야 하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전 춤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네이버 직업란에 ‘댄서’가 추가된 것만으로도 인식이 달라지고, 문화가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이 좋은 무대를 봤을 때 안무를 누가 만들었는지까지 궁금해하니까요. 하지만 이걸 누리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인 만큼 다함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되고 싶은 건 없어요. 다만, 솔직한 춤을 추고, 솔직한 창작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