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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보다 앞섰던… 최초의 추상화가가 왔다

조선일보 부산=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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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
부산현대미술관서 亞 첫 순회전
힐마 아프 클린트가 1907년 그린 대형 추상화 10점이 드넓은 전시장에 나란히 걸렸다. 원·나선·곡선 같은 형상, 상징 기호와 대칭 구조를 통해 인간 생애를 네 단계로 나눠 표현한 연작이다. 높이 3m 넘는 대작 열 점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허윤희 기자

힐마 아프 클린트가 1907년 그린 대형 추상화 10점이 드넓은 전시장에 나란히 걸렸다. 원·나선·곡선 같은 형상, 상징 기호와 대칭 구조를 통해 인간 생애를 네 단계로 나눠 표현한 연작이다. 높이 3m 넘는 대작 열 점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허윤희 기자


1944년 세 명의 추상화가가 세상을 떠났다. 바실리 칸딘스키, 피터르 몬드리안, 그리고 힐마 아프 클린트.

추상 미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칸딘스키나 빨랑·파랑·노랑의 삼원색으로 유명한 몬드리안과 달리, 마지막 화가는 불과 몇 년 전까지 대중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칸딘스키가 처음 추상화를 그렸다고 알려진 1911년보다 5년 앞서 추상화를 그린 스웨덴의 여성 화가. 자신의 작품이 이해받지 못할 것을 안 힐마는 “내가 죽은 후 20년 동안 작품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봉인됐던 1300여 점의 그림과 2만6000쪽의 노트는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조명받기 시작했다.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할 타임캡슐이 100여 년 만에 열린 것이다.

5인회, '무제'. 1908년 2월 5일, 종이에 드라이 파스텔, 흑연, 53×62 cm. 힐마는 1896년 여성 4명과 함께 영적 모임이자 공동체인  '5인회'를 결성했다. /부산현대미술관

5인회, '무제'. 1908년 2월 5일, 종이에 드라이 파스텔, 흑연, 53×62 cm. 힐마는 1896년 여성 4명과 함께 영적 모임이자 공동체인 '5인회'를 결성했다. /부산현대미술관


묻혀 있던 최초의 추상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가 부산에 왔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국내 최초 대규모 회고전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이 19일 개막했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지난달 15일 폐막 후 부산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첫 순회전이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주요 회화 연작을 중심으로 드로잉, 기록 자료 등 총 139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연대기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사유와 질문을 따라간다. 1862년 스톡홀름 근교에서 태어난 힐마는 당시 여성으로는 이례적으로 스웨덴 왕립미술학교에서 정식 미술 교육을 받았다. 초기엔 식물과 동물, 초상화, 풍경화를 그렸으나 서서히 형상이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힐마는 당시 유럽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신지학(神智學)에 심취해 있었다. 신지학은 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탐구하고자 했던 사상 체계로, 힐마의 작품에 이론적 배경이 됐다.

1915년 작 ‘No. 1, 그룹 X, 제단화’. 237.5×179.5 cm. /부산현대미술관

1915년 작 ‘No. 1, 그룹 X, 제단화’. 237.5×179.5 cm. /부산현대미술관


최상호 학예연구사는 “힐마는 회화 작업을 신의 계시를 받아 어떤 큰 질서로부터 받아 적는 작업이라고 여겼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신지학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로부터 ‘작업 방식이 부적절하고 50년 이내 동시대인은 받아들이지 못할 그림’이라는 혹평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조카의 다락방에 봉인됐던 그림은 1986년 미국 LA카운티미술관 단체전에서 처음 공개됐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2013년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회고전에 이어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힐마 아프 클린트, 미래를 위한 그림’에 60만명 넘는 관객이 몰리면서 전 세계적 열풍이 불었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10점의 대형 회화'가 나란히 걸린 하이라이트 공간. /부산현대미술관

힐마 아프 클린트의 '10점의 대형 회화'가 나란히 걸린 하이라이트 공간. /부산현대미술관


10점의 대형 회화 중 'No. 7, 성인기, 그룹 IV'. 1907, 종이에 템페라, 캔버스에 부착, 315×235cm. /부산현대미술관

10점의 대형 회화 중 'No. 7, 성인기, 그룹 IV'. 1907, 종이에 템페라, 캔버스에 부착, 315×235cm. /부산현대미술관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드넓은 공간에 나란히 걸린 ‘10점의 대형 회화’. 높이 3m 넘는 대작 10점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원·나선·곡선 같은 형상, 상징 기호와 대칭 구조가 분홍·주황·노랑색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인간의 생애를 유년기·청년기·성인기·노년기의 네 단계로 나눠 표현한 연작 추상화다. 힐마는 이 그림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흐름과 보이지 않는 질서를 하나의 긴 이야기처럼 구성하려 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캔버스에 붙이는 방식으로 시간을 단축해 대작 10점을 두 달 만에 완성했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친필 노트. 전시장에서 실물과 영상으로 볼 수 있다. /허윤희 기자

힐마 아프 클린트의 친필 노트. 전시장에서 실물과 영상으로 볼 수 있다. /허윤희 기자


미술관은 “힐마를 최초의 추상 화가라는 수식어에만 가둬두지 않고 폭넓게 조명하려 했다”고 전시 의도를 밝혔다. ‘신전을 위한 회화’ ‘원자’ ‘무제’ 등 주요 연작과 노트에 쓴 기록을 통해 작가의 사유가 정제된 형태로 구현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말년의 힐마는 작업량이 점점 줄었고 평생의 작업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데 힘썼다. 생애 말기에 이르면 초기의 식물과 자연에 관한 관심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보인다. 미술관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전체 작업의 궤적을 이어주는 마무리”라고 했다.

힐마 아프 클린트, '보리에 대하여, 꽃과 나무를 관찰하며'. 1922, 종이에 수채, 18×25.5 cm. /부산현대미술관

힐마 아프 클린트, '보리에 대하여, 꽃과 나무를 관찰하며'. 1922, 종이에 수채, 18×25.5 cm. /부산현대미술관


최상호 학예연구사는 “한때는 너무 일찍 도착했다며 외면한 그의 작업은 이제 ‘너무 늦게 발굴한 천재’라는 편협한 수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고 있다”며 “그가 왜 추상을 시작했는지, 힐마가 던진 질문과 배경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했다. 강승완 관장은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초월한 진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10월 26일까지. 성인 1만원.

힐마 아프 클린트.

힐마 아프 클린트.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스웨덴 왕립미술학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초기엔 식물·동물·초상화·풍경화를 그렸다. 신지학에 심취해 서서히 형상이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의 계시를 받아 보이지 않는 세계 너머의 질서를 그림으로 옮긴다고 여겼다. 유언에 따라 사후 20년간 그림이 공개되지 않았다. 21세기 와서야 ‘세계 최초의 추상화가’로 각광받고 있다.

[부산=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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