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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시심[이준식의 한시 한 수]〈325〉

동아일보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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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가 배의 창문을 두드려, 때마침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다.

귓가엔 감미로운 빗소리 맴돌고, 이불을 덮으니 냉기조차 사라진다.

이곳 남쪽 땅은 벌써 촉촉해졌는데, 북쪽 땅 생각하니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순식간에 빗소리는 점점 잦아드는데, 마음 뒤숭숭하여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네.

(夜雨打船窓, 恰値淸夢醒. 入耳適宜聽, 披衾不覽冷. 即南已增潤, 憶北牽懷永. 須臾聲漸稀, 無眠以耿耿.)

―‘밤비(야우·夜雨)’ 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1711∼1799)


짧은 순간, 시인의 감정은 고요와 불안을 넘나든다. 꿈결 같은 평온함에 젖었나 싶더니 어느새 북쪽 땅을 떠올리며 심란해진다. 겨우 빗소리 하나에 일렁이는 이 섬세한 감정선, 이 정도면 시심(詩心)이 동하고도 남을 성싶다. 이 시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다. 제왕이 순행 도중 이런 감성을 토해냈다면 ‘북쪽 땅 생각’이 향수병일 리는 없다. 혹 중원 지역의 가뭄을 염려한 때문이었을까. 그렇더라도 이 감성 폭발은 황제로서는 다소 과한 센티멘털리즘 같아 보인다.

건륭제가 남긴 시는 무려 4만2000여 수에 달한다.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당시 전체의 수가 총 4만8000여 수인 점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수치다. 황제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시상이 넘쳤을까. 이런 천진한(?) 작품까지 전해진다. ‘한 조각 한 조각 또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네다섯 조각. 여섯 조각 일곱 조각 여덟아홉 조각, 갈대꽃으로 날아드니 아예 보이질 않네.’(‘흩날리는 눈’)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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