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차별금지법 리부트 [김명인 칼럼]

한겨레
원문보기



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새 정부가 들어서고 한달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야 정부 각 부처 장관들에 대한 인선이 마무리되고 청문회가 시작되고 있으니 아직도 ‘국민주권정부’의 수립은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솔직히 마음이 많이 편해진 것이 사실이다. 내란의 완전한 종결도 국민생활 안정과 경제위기 탈출도 미국발 관세 위기 상황도 아직 귀추가 불투명하지만 큰 걱정이 되지 않는다. 새 정부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만하면 됐다 하고 낙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선 지난 촛불정권에 대한 기대와 실망의 낙차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겪은 대실망이 남겨준 학습효과가 여전히 역력하다. 또한 이번 내란세력에 대한 승리는 특정 정치세력의 승리가 아니라 지난 반년 동안 민주헌정 수호 투쟁에 참여한 모든 시민들의 승리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나라를 윤석열 정권 이전으로 돌려놓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하다. 지난 2016~2017년 겨울 촛불시민이 꿈꾸었던, 지난겨울 응원봉 연대와 키세스 전사들이 꿈꾸었던 ‘다시 만날 세계’의 지평이 고작 지금 이곳일 리가 없다. 우리는 지금부터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하고 더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나는 그 먼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에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오랜 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제대로 된 시민민주주의 체제로 가기 위해서는 폐기되어야 할 한개의 법과 제정되어야 할 법 하나가 있다. 폐기되어야 할 법은 국가보안법이고 제정되어야 할 법이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그중에서도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차별금지법 제정이 먼저이다. 국가보안법의 근거가 되는 ‘북한위협론’에는 그나마 얼마간의 설득력이 남아 있지만 차별금지법에 대한 저항의 근거가 되는 특정한 종교적 신념은 도대체 어떤 합리적 설득력도 찾아볼 수 없는 미신적인 집착이며, 본질적으로 반인권적인 파시즘적 사고체계의 소산이다. 실제로 특정한 소수자들에게는 명백한 생존권적 위협으로 작동하고 있는 사회적 폭력이다.



우리 현행 헌법의 제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다. 곧 보편적 평등권이다. 조항에는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만 특정되어 있으나 이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그 직전 문장에 기속되므로 여기에 인종, 피부색, 출신 계급이나 지역, 사상, 직업, 학력, 재산 정도, 언어, 범죄 전력 여부, 성적 정체성과 취향 등등 사람들 사이를 구분 짓는 차이에 따른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차이는 배제의 근거가 아니라 다양성의 표지이며 한 국가사회의 구성원들이 지닌 다양성이 보편적으로 보장되는 것이야말로 평등권의 핵심이며 건강한 사회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성별, 종교, 계급은 물론이고 온갖 종류의 사회적 차이와 위계에 따른 촘촘한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의 메커니즘이 엄연히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이 평등해야 할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재생산하는 ‘악의 축’이 되고 있다. 내란의 위기를 극복하는 주역이었던 이름 없는 약자·소수자 시민들이 꿈꾼 ‘새로운 세계’란 바로 이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의 장벽이 무너진 세계이다.



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의 역사는 차라리 잔혹한 것이었다.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것은 노무현 정권 때인 2007년이었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로 인해 성적 지향 등 7개 항목이 삭제되는 등 수난을 입고 결국 2008년 17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되기에 이른다. 이명박 정권 때인 2010년에도 법무부 주도의 차별금지법 특위가 만들어져 운영되었다가 중단되었고, 2011년에도 민주노동당이 재차 발의했으나 역시 2012년 18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고 2012년, 2013년에도 계속 발의는 되었지만 폐기되거나 철회되는 사태가 반복되었다. 급기야 2017년 당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공공연히 밝혔고, 2020년에는 국회 발의로, 2021년에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의 형식으로 다시 법 제정이 논의되었지만 역시 보수 기독교계의 집요한 반발에 의해 무산된 채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2007년 이래 14차례나 법 제정을 권고한 유엔 관련 기구와 세계의 주목 앞에 언필칭 선진국으로 면이 안 선다.



그러면 이제 차별금지법 제정은 물 건너간 것인가.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취임 1개월 만에 열린 공개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사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지만 민생과 경제살리기 과제에 비해 경중선후에서 밀리는데다 민감한 과제로서 의회에서의 집중토론을 통한 해법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한걸음 발을 빼는 모양새를 보였다. 또한 김민석 국무총리는 “사회·경제·정치적 약자를 단 한명이라도 남겨놓지 않고 찾아서 구하겠다”는 감동적인 연설에도 불구하고 정작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대가 본질적이고 헌법적인 권리라는 궤변을 지론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 문제에 관한 한 전혀 전향적일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무 부처라고 할 수 있는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조차 갈등 사안이므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판에 박힌 수사학을 반복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과연 이대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수 없는 나라로 남을 것인가. 모든 구성원들에게 평등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절대 원칙이 특정 종교집단의 비합리적 신념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손되고 거부되는 나라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 아니면 전근대적 신정국가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한 우리의 민주헌정체제는 언제든 특정 집단의 비이성적 광기와 오도된 행동에 의해 손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 취약한 체제로 남아 있게 된다. 물질적 경제적 문제 해결을 앞세워 사회적 정신적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는 나라는 결코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새로운 나라가 아니다. 나는 임기 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여부를 이재명 정부 역사적 평가의 최우선 지표의 하나로 삼고자 한다.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손예진 현빈 아들
    손예진 현빈 아들
  2. 2하나은행 사키 신한은행
    하나은행 사키 신한은행
  3. 3김동완 가난 챌린지 비판
    김동완 가난 챌린지 비판
  4. 4쿠팡 정부 진실 공방
    쿠팡 정부 진실 공방
  5. 5황하나 마약 투약 혐의
    황하나 마약 투약 혐의

한겨레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