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래도 살아간다 : 귀농인 강석구
연고 없는 산골마을서 '맨땅에 헤딩' 버텨
결실 문턱에서 모든 걸 앗아간 '괴물 산불'
이웃들은 구했지만 딸이 선물한 차는 불타
타 죽은 호두밭 보며… 첫 마음 떠올렸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 모티마을로 귀농한 강석구씨.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
“다시 돌아가라 하면 / 싫어요 난 못 가요 / 비단옷 꽃길이라도” (윤수현, 꽃길)
강석구(68)는 지난 6년을 돌아보면 이 노랫말부터 떠올린다. 스스로 원했던 ‘꽃길’이지만 다시 걸을 용기는 좀처럼 나지 않는 길. 힘들면서도 좋아서 이 악물고 버틴 길. 2020년, 가족과도 떨어져 경북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 모티마을에서 그가 보낸 6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고됐지만 결실은 있었다. 어린 호두나무 묘목은 작년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부산 살던 외지인이 안동 김씨 집성촌 마을에 정착하긴 쉽진 않았지만, 결국 마을 일원으로 녹아들었다. 세입자 신세를 청산하고 구입할 집을 골랐고 가격 흥정도 마쳤다. 도장 찍을 날짜까지 정해졌다.
그러나 석구는 집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는 은박 스티로폼이 깔린 대피소 바닥에 누워 캄캄한 천장만 바라봤다. 마을을 덮친 산불은 모든 걸 삼켰다. 사려던 집도, 호두나무 밭도, 지난 6년도.
강석구씨가 4월 30일 안동 길안면 대곡2리에 위치한 호두나무 밭에서 마른 가지를 만지고 있다. 경북 산불이 이곳을 덮친 3월,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던 호두나무들은 한 그루도 살아남지 못했다. 안동=김나연 기자 |
태풍 같은 불
3월 25일 오후 석구는 마을회관에 있었다. 회관 창문을 열자 먼 산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바람이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실제 오후 3시, 안동엔 강풍주의보가 발효됐다. “아이고, 불 금방 넘어오겠는데.” 석구가 걱정하자 누군가 대꾸했다. “아냐, 한참 걸려.” 머쓱해진 석구는 말없이 믹스커피 세 잔을 탔다. 모티마을 막내인 그는 만년 커피 당번이었다.
석구는 바람과 불은 잠시 잊고 마을 사람들과 회관 마룻바닥에 앉아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종이컵 한 잔에 담긴 커피는 너덧 번 삼키면 바닥을 보였다. 종이컵을 모아 회관 구석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무심코 다시 창밖을 내다봤을 때 석구는 눈을 의심했다. 바로 앞산이 시뻘겋게 불타고 있었다. 커피 한 잔 마신 사이에.
3월 25일 안동시 일직면 남안동 나들목(IC) 인근에서 산불이 번지고 있다. 독자 제공 |
“바람하고 연기하고 같이 막 불덩어리가 날아다녔다니까. 저 앞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1분도 안 걸렸다니까.” 마을의 울타리 같던 산은 그날 불쏘시개가 됐다. “앞뒤로 온 천지가 불에다가, 어찌나 바람이 부는지 태풍 저리 가라 해. 불태풍이야 불태풍. 그 상황을 아무도 몰라.” 그날을 회상하는 석구가 몸을 조금 떨었다.
소방청 자료에 따르면 당시 안동 길안면 대곡리의 바람 속도는 초속 14~22m에 달했다. 태풍이 초속 17m(열대성 대기압 중심부 최대풍속)이니, ‘불태풍’이란 석구의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맞다 석구, 강석구. 그 아재가 나 구했다. 석구 아재 아니었음 그날 우린 죽었다.”
길안면 길안중 대피소 텐트에서 만난 황순금(86)이 말했다. ‘강석구’란 이름 세 글자를 들은 그는 몇 번이나 "석구 아재 아니었음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순금은 십 대에 모티마을로 시집온 뒤 남편이 몇 해 전 세상을 떠나 산골 집에 혼자 남았다. 면으로 나가려면 하루에 세 번만 오가는 버스를 타거나 마을 사람 차를 얻어 타야만 했다.
3월 25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백자리 주변 산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 소방관계자들이 대피 명령이 내려진 마을을 통제하고 있다. 안동=뉴스1 |
그날 순금을 포함해 할머니 둘을 트럭에 태우고 탈출한 사람이 석구였다. 석구는 불을 본 순간 생사의 갈림길이란 걸 직감했다. “불이야 불!” 마을 방송보다 더 빨리 집집마다 외쳐댔다. 당장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귀농해 막막한 심경으로 헤맬 때, 선뜻 ‘밭에 대다 쓰라’며 물을 내어준 할머니들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네들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사는 것도, 운전을 못 하는 것도, 빤히 아는데.
석구는 자고 있던 순금을 겨우 깨웠다. 그러나 목욕 중이던 방씨 할머니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석구는 돌로 화장실 유리를 깬 뒤 알몸의 할머니를 구해냈다. “5분도 안 돼 가지고 다 타버리니까, (옷 못 입은) 그게 문제가. 타 죽는 게 문제지. 집 나와가지고 마당에서 옷 입히고 그랬다.”
석구는 두 사람을 태우고 불타는 산길을 달리며 ‘이분들 죽으면 내 잘못이다’ 몇 번이고 되뇌었다. 좁고 구불구불해 바퀴가 도로 끝에 빠졌다간 바로 굴러떨어지는 외진 산길인데 연기가 자욱해 한 치 앞도 안 보였다. “양쪽 빽빽한 나무들에 불이 붙으니 가운데가 터널이 되잖아. 연기가 가운데로 막 쏠리니까 앞이 안 보이는 거야. 그렇다고 창문을 열 수가 없잖아. 연기가 들어오니까. (20분 거리인) 면까지 나가는 데 거의 3시간 걸렸나. 가다 서다 막 이랬잖아. 안 보이니까.”
차에 불이 붙지 않은 건 천운이었다. 트럭 부품 몇 개가 불에 탔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트럭) 한쪽엔 물받이가 있는데, 다른 한쪽엔 없더라고. 그래서 정비사한테 어디 갔냐고 물어보니까, 사장님 다 탔는구만, 그러더라고.”
조용한 봄
강석구씨가 5월 8일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 모티마을에서 마을 소개가 적힌 안내판을 짚고 있다. 안동=김나연 기자 |
‘이 마을은 외부의 침략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이 조상 숭배와 선비 정신을 근본으로 하면서 살아온 안동 김씨 집성촌이다.’
“나도 이건 처음 읽어보네.” 석구가 모티마을 역사 안내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침략자 발길이 왜 못 미쳤는지는 가보면 알게 된다. 능선을 타고 길안면에서 차로 10여 분 달리면, 대곡1리와 2리를 나누는 갈림길이 나온다. 대곡2리 길이 더 험하다. 꺾어지고 좁은 산길을 차로 15분 더 달리면 모티마을 회관이다. 거기서 가파른 산길을 5분 더 올라가면, 양옆으로 뻗은 갈림길 앞 나무에 팻말이 걸려 있다. 검은 팻말에 멋스러운 하얀 글씨로 ‘대곡농원’이라 적혀 있다. 2020년, 석구가 밭을 일구며 세운 팻말이다. “내가 붓으로 썼어. 일부러 모양이 있으라고 빼딱빼딱하게 그래 썼어.” 석구의 표정에서 자부심이 배어 나왔다.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 산길에 '대곡농원'을 가리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강석구씨가 2020년 귀농하면서 직접 글씨를 써서 걸어둔 팻말이다. 안동=김나연 기자 |
팻말 방향으로 꺾으면 길은 더 험해진다. 좁고 난간 하나 없는 높은 길이 펼쳐진다. 왼편으론 산과 밭이 내려다보인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몇 번이고 ‘갈지자(之)’를 그리며 내려가면 3만3,000㎡(1만 평)짜리 넓은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석구의 대곡농원이다.
5월 8일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에 위치한 강석구씨의 대곡농원 일부. 잡초로 가득해진 가운데 호두나무 등 나무들이 앙상하게 말라 있다. 밭을 둘러싼 산은 산불로 검게 타 있다. 안동=김나연 기자 |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졌다 이런 속담도 있는데, 진짜 6년을 투자했는데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 버렸으니까 이거를 복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내가 선택한 일이니 누구한테 원망도 못 해.”
석구가 호두나무 가지를 뚝뚝 꺾었다. 진액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가지 안은 바싹 메말랐고 꽃눈도 말라붙어 있었다. “이 봐. 다 죽었지.” 타지 않은 나무도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죄다 말라 죽어 있었다. 초등학생 키만 한 나무들을 아무리 둘러봐도, 새순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뿌리만 살아남아 여린 곁순이 땅 위로 돋은 게 고작이었다. 양손을 1m쯤 벌린 석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만한 거 갖다 심어서 5년 동안 이 정도(죽은 나무들) 큰 거야. 다시 이만치 키울라 카면 얼마나 세월이 걸리겠어.”
강석구씨가 4월 30일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에 위치한 자신의 밭에 심어놓았던 호두나무 가지를 꺾어보고 있다. 꺾인 가지의 안쪽 단면이 메말라 있다. 안동=김나연 기자 |
안동 길안면 대곡2리에 위치한 강석구씨의 밭에 심긴 호두나무 가지와 꽃눈이 검게 말라붙어 있다. 죽은 나뭇가지 사이에 거미줄이 걸려 있다. 안동=김나연 기자 |
다시 밭을 일구고 나무를 가꿔야 할까. 고생 고생한 6년이 다시 시작된다 생각하면 석구는 아찔했다. 농원을 가꾸는 데 든 돈만 2억 원 남짓. 얼마나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들인 돈의 절반가량이면 잘 받는 것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가족들 생각해서 접고 부산으로 다시 갈까’ ‘여기 올 때 마음은 이게 아니었는데’ 요즘 석구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한다.
로망이 뭐길래
“열심히 했지. (농원 밖으로) 잘 안 나오는 거 보면 알지.” 권귀(86)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갓집도 남편도 안동 김씨여서 75년째 모티마을에 살고 있는 할머니에게도, 정착한 지 6년밖에 안 된 석구는 어엿한 마을 사람이었다. “호도나무 저거 사다 숨갔지(심었지). 그게 한 5년 됐는데, (밭으로) 불이 다 내려왔다 하더라.” 할머니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외진 밭을 일구는 과정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전기와 통신부터 끌어와야 했다. “저 비닐하우스(지금은 불에 녹아내린)에서 6개월 살았어. 처음엔 전기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겨울에 왔거든. 합판을 사와 갖고 침대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자는데 얼마나 추웠겠나. 그래 갖고 차에 밤새 시동을 걸어놓고, 그러면 배터리 전기가 생산되잖아. 그걸 연결해 갖고 전기장판을 쓰고 이랬다고. 기름값은 얼마나 많이 드는지.”
3월 26일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 '대곡농원' 부지 안에 있던 비닐하우스가 전소돼 있다. 강석구씨가 귀농 초반이던 2020년 겨울을 보낸 비닐하우스다. 강씨 제공 |
길안 농가 대부분은 사과 농사를 짓는데 왜 호두나무였을까. 이 땅도 원래 주인은 사과나무를 심어 뒀다. 석구는 고개를 저었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아이템을 갖고 해야지, 남들 다 하는 거 하면 성공 몬 한다.” 호두나무는 열심히 궁리한 결론이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노령화되잖아. 그러면 제일 많이 먹는 게 뭐야. 견과류야. 노인들이 호두 같은 걸 많이 먹으면 치매 예방이 돼. 그러니 이런 걸 지어야지.”
아무 연고 없는 모티마을을 고른 것도 호두 때문이었다. “호두는 너무 더운 지방에선 안 돼.” 석구는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던 차에 이 땅을 발견했다. 농기계를 들여올 수 있는, 서늘한 고랭지. 원하던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곳이었다. “여기 와가 돌아보고 딱 1시간 만에 결정했지.”
작은 호두나무 묘목이 열매를 맺기까진 벌을 키웠다. “복합 영농을 해야 돼. 사과 농사를 짓는다 치면, (나무가 어린) 3년 4년 동안은 수확이 없잖아. 그럼 뭐 먹고살아. 그러니까 (나무가 클 동안) 다른 걸 해야 되는데, 나는 양봉을 한 거야.” 벌은 사과 수분에도 필수적이라 주변 농가들과 궁합도 좋았다. 그러나 말처럼 쉽진 않았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벌에) 쏘였지. 한 방만 쏘여도 막 이래 됐지.” 석구는 눈두덩이에 주먹을 대 보였다.
그가 돌보던 벌통 33개는 기특하게도 전부 겨울을 났다. 봄 번식기가 목전이니, 분봉(여왕벌이 산란한 뒤 새 여왕벌이 일벌의 일부와 함께 다른 벌통으로 옮겨가는 것)을 거치면 몇 배로 불어날 참이었다. 5년을 기른 호두나무도 올해부턴 수확량이 궤도에 오르니, 양봉업을 졸업하고 팔면 딱이라 생각했다.
강석구씨가 벌을 키웠던 벌통들 뒤로 새까맣게 탄 산이 보인다. 벌통 33개에 든 벌들은 산불에 전부 죽었다고 강씨는 말했다. 안동=김나연 기자 |
하지만 다 지난 얘기다. 저온창고에 있던 벌통 33개는 모조리 탔다. 살구나무, 개암나무, 참다래… 가족들과 열매를 나누려고 조금씩 심어둔 나무들도 다 타고 말라 죽었다. 밭에서 기르던 개 3마리는 새까맣게 타 죽어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흰 이빨을 보고서야 겨우 알았다. 석구는 3마리를 고이 묻어줬다.
석구가 애지중지하던 구형 스포티지 차량도 전소됐다. 18년 전 큰딸이 결혼하면서 준 선물이다. “진짜 소중하게 탔는데. 고장도 안 나고 사고도 안 났는데. 나이가 들어갖고 폐차를 시키면 좀 덜 그럴 텐데… 마지막 가는 길이 불에 타 가잖아. 그러니까 너무 안돼.” 멀리 있어도 딸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던 그 차를 폐차하던 날, 석구는 눈물을 훔쳤다.
3월 26일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 '대곡농원' 길가에 주차돼 있던 강석구씨의 스포티지 차량이 전소돼 있던 모습. 강씨 제공 |
40년 지난 꿈
“호루라기가 없네. 오늘은 밭일 안 해야겠네.” 밭을 둘러보던 석구가 멈칫했다. 오전에 볼일을 보고 오면서 호루라기를 집에 놓고 왔다는 것이다.
일할 때 호루라기를 지니는 건 그의 철칙이다. 인적이 드문 밭에서 사고라도 당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골에 보면은 사람들이 많이 죽어. 혼자 일하다가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기계가 넘어가 찡겨 죽는 수도 있거든. 사람이 안 먹고도 이틀은 버티잖아. (움직이지 못하게 돼도) 누가 지나갈 때 호각을 불면 소리를 듣고 오니까. 그런 안전 조치는 자기가 해야 돼.” 깊은 산골에서 혼자 일하는 건 힘들고 외로울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란 걸, 석구는 잘 알고 있었다.
강석구씨가 대곡농원에서 기르는 거위 세 마리는 산불 당시 물웅덩이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다. 농대 축산과를 졸업한 강씨는 식물뿐 아니라 동물을 기르는 것도 좋아한다. 거위들은 난폭해 합사가 어려워, 강씨는 세 마리를 모두 '깡패'라고 부른다. 안동=김나연 기자 |
석구는 경북 상주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농업인이었다. 보고 자란 게 농사라 자연스럽게 농부의 꿈을 키웠다. 대학도 축산과에 입학했다. 졸업하면 아버지 농장을 물려받는 게 그의 인생 첫 꿈이었다.
그러나 스물세 살 석구를 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농장은 처분됐다. 그때부터, 당연하게 여겨왔던 미래는 당연하지 않게 됐다. 부산에 정착한 그는 먹고살기 위해 되는 대로 일했다. 회사도 다녔다가 감자 장사, 콜 밴, 호프집, 김밥집, 콩나물 국밥집…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가장 잘 된 건 식당이었다. 김밥집은 기내식 납품까지 들어갈 만큼 대박을 쳤다. "손님이 막 정신없이 밀어닥치는데, 50m 줄서기는 기본이라." 노후 자금도 모였겠다, 평생의 로망을 다시 찾아가도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스물셋에 접었던 꿈을 예순둘이 돼서야 펼칠 수 있었다. 갑자기 귀농을 한다니 가족들은 웃어넘겼다. “우리 딸들도 안 믿어줬지. ‘일주일만 있으면 다시 온다’ 이거다.” 그 말에 더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 속으로만 삼키고 또 삼켰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고생이 되고 어려움이 있어도 말을 못 해. 가족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할 거…”
덤덤하던 목소리가 뒤틀렸다. 석구는 말을 멈추고 흐느낌을 참았다. 어깨와 가슴이 들썩거렸다. 석구는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왜 거기 가서 고생하려고 하느냐고 다 말렸지. 그치만 내가 도시에 있어본들 뭐 하겠나. 뭐 경비밖에 더 하겠어. 나는 그런 게 몸에 안 맞아.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번 해봐야겠다 싶어서 일로 왔어.”
그러나 힘들긴 정말 힘들었던지,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어떤 것이 힘들었냐고 물으면, 그는 잠깐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한 마디만 하고 만다. “말로 다 할 수가 없지.” 농사일도 그렇지만, 핏줄로 이어진 안동 김씨 집성촌 마을에 외지인이 정착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텃세에 대해 조심스레 물으면 그는 항상 딴청을 피웠다. “희생을 많이 해야지. 그리고 마음을 비워야지.” 모티마을을 ‘내 마을’로 생각한다는 석구는 그 말만 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시작하는 봄
지난해 봄과 올해 5월 강석구씨의 호두나무 밭 모습. 작년 봄 풍성하게 잎을 틔웠던 강석구씨의 호두나무 밭(위 사진)은 산불이 지나간 뒤인 올해 검고 앙상한 나무들로만 가득했다. 강씨 제공·김나연 기자 |
5월을 맞은 석구의 밭은 완연한 봄이었다. 쑥이며 잡초, 풀꽃이 정강이까지 자랐다. 빽빽한 풀잎이 발목을 간지럽혔고 옷소매엔 민들레 홀씨가 잔뜩 붙었다. 그래서 앙상한 호두나무와 새까만 산이 더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긴 속앓이를 끝낸 듯 석구는 한결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는 비탈 아래 빈집 대문을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이 집을 살 거야.”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 모티마을에 위치한 한 주택 모습. 강석구씨는 이 집을 살 예정이라고 했다. 안동=김나연 기자 |
강석구씨가 5월 8일 안동시 길안면 대곡2리 새 집 마당에 있는 불에 탄 정자를 살피고 있다. 안동=김나연 기자 |
집 마당엔 잡초가 가득했다. 나무로 만든 정자는 불에 탄 흔적이 역력했다. 바닥이 아예 내려앉았고, 네 기둥 아래쪽도 그을리고 벗겨져 있었다. “이게 이번에 불에 탔어. 나중에 내가 나무해가지고 또 만들면 돼. 농기계 빌려와서 풀도 깎고. 애들 오면 여기 잔디밭에서 바비큐 해 먹을 거야.”
석구에겐 계획이 가득했다. 탄 지붕을 걷어내 새 지붕을 깔고, 마루도 새로 만들고, 비닐하우스를 새로 지어 파파야 같은 열대 과일도 키우고. 호두나무는 뽑아내기로 했다.
“이제 비타민나무(산자나무)를 심으려고. 내가 처음에 이걸 하려고 했어.” 산자나무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도 견딜 수 있어 몽골에서 주로 키운다고 한다. 비타민 가득한 산자나무 열매는 몸에 좋은 약재라는 석구 설명이 이어졌다. 아직 한국에는 덜 들어온 나무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고. 언제 그렇게 공부를 했는지, 산자나무 얘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여기 들어올 때 죽을 때까지 살 생각으로 왔어. 100세까지 산다고 치면, 예순두 살에 들어왔으니 38년 살 생각으로 왔지. 6년 지나고 이제 32년 남았잖아. 다시 한 번 더 해야지.”
산불은 석구의 지난 6년을 태웠지만, 꿈까지 태우진 못했다. 남은 32년을 시작하는 봄의 중턱에서, 그의 눈은 반짝였다. 그는 들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석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다던 지난 6년을 ‘꽃길’이라 불렀다.
강석구씨가 새 집 마당에 앉아 미소짓고 있다. 타버린 정자도 빽빽한 잡초도, 그는 고치고 자르면 된다고 말했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
그래픽=김대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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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나연 기자 is2ny@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