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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관세 협상, 후폭풍 분담이 중요하다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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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2일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상호관세 행정명령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2일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상호관세 행정명령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비준되던 날 기억이 생생하다. 한 진보당 의원이 비준을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터뜨렸던 장면은 너무도 강렬했다. 그보다 몇해 전, 협상이 한창일 때 대학에 다녔다. 당시 종종 참고하곤 했던 유명한 진보·자유주의 논객들은 대부분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했다. 그다지 급진적이지 않은 나조차도 협상이 타결될 때, 그리고 국회에서 최루탄이 터질 때, 마치 나라가 망할 것 같은 걱정에 휩싸였다.



그 후 십수년간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생각보다 잘 작동해왔다. 우리 연구원이 2022년 발간한 ‘한-미 에프티에이 발효 10년 성과와 시사점’에 따르면, 양국 간 상품·서비스 수출입과 투자 모두 활발해졌으며 소고기, 의약품, 영화 등 우려의 대상이었던 국내 산업에서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장개방을 계기로 국내 제도와 기업 거버넌스가 국제표준에 맞게 개선되면서 경쟁력이 향상됐다. 물론 국내 반대 여론을 지렛대 삼아 유리한 협상 조건을 끌어낸데다가 피해 산업의 자체적인 경쟁력 제고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2025년, 다시 돌아온 트럼프가 자유무역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그의 첫번째 임기 때 개정됐던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이번 임기에 헌신짝처럼 버려질 위기다. 자동차, 철강 등 품목별 관세는 이미 시행 중이고, 협상이 결렬되면 당장 다음달 1일부터 모든 품목에 25%의 상호관세가 부과될 예정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관세 부과에 격렬히 반대하는 쪽은 이번에도 진보·자유주의 진영이다. 그토록 격렬히 저항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폐기 수순인데 오히려 환영할 일 아닌가.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자유무역에 대한 찬반 역시 그리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무역정책은 현재 경제구조에 따라 이익을 보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집단들 사이의 권력관계는 무역정책을 유지시키기도, 변경시키기도 한다.



세계경제에서 처음으로 자유무역이 대세가 됐던 19세기를 예로 들어보자. 영국의 신흥 자본가나 공장 노동자들은 자기 물건을 미국에 수출하면서 얻는 이익이 컸지만, 농장을 소유한 지주들은 미국의 싼 곡물이 수입되면서 손해를 봤다. 민주주의가 일찍 발달한 영국에서는 전통적 귀족계급에 속한 지주보다 자본가, 노동자의 입김이 더 셌기 때문에 자유무역이 유지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똑같이 민주주의 체제였던 미국은 보호무역으로 돌아섰다. 농장주보다 정치권력이 큰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제조업 보호를 원했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과 비슷한 조건이지만 왕정 체제였던 독일은 지주의 이익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농산물 수입을 제한했다. 19세기 세계경제는 경제구조-정치체제-무역정책 간의 상관관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현재 미국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싱크탱크 ‘미국의 나침반’의 설립자 오렌 캐스는 지난달 출간한 편저서 ‘새로운 보수주의자들’(New Conservatives)에서 트럼프 무역정책의 배경을 설명한다. 현직 미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와 트럼프 1기 무역대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를 포함한 저자들은 노동자들이 땀 흘려 일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전통적인 미국 경제성장 모델로 회귀하기를 꿈꾼다. 이 꿈을 좌절시키는 건 정부 보조금으로 싼 물건을 만들어 세계에 뿌리는 중국이다. ‘새로운 보수주의자들’은 19세기와 같이 보호무역 정책을 채택해 미국의 제조업을 부흥하고 노동자들에게 생활 기반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무역정책에 대한 찬반이 그 정책의 손익계산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례임은 자명하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한 시장 개방이 경제 전체에는 유익했지만, 경쟁에서 탈락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기업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서두에 인용한 보고서에도 임금 상승과 혁신 효과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수출기업에 집중되었다는 연구결과가 제시됐다. 세계화의 광풍을 거쳐 겨우 자리를 잡은 노동자들에게 보호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또 다른 충격이다. 우리 기업 생태계에서 수출기업이 흔들리면 가장 먼저 피해 볼 계층은 하청, 재하청 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충분히 힘이 있다면 보호무역으로의 회귀를 막아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계화가 진전되던 시절처럼 온몸으로 손해를 받아내야 할 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분배에 대한 충분한 고민 없이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자멸의 씨앗을 심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래쪽의 피해가 무시된 채 이뤄진 개방의 파괴력만큼이나 아래쪽의 피해가 무시된 채 진행되는 고립의 파괴력은 클 것이기에, 보호무역으로 회귀하는 데 쉽게 찬성할 수 없다. 미국이 하자는 걸 우리가 어찌할 수 없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익과 손해를 고르게 분담시키는 것은 국내 정치의 몫이다. 이재명 정부엔 관세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는 것을 넘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사람들을 더 세심하게 챙길 의무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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