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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사라진 ‘방화수류정’ 현판, 정조 때 글씨 원본 찾았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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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 방화수류정 완공 당시 명필 조윤형이 쓴 현판 글씨 원본. 전체 가로 185㎝, 세로 47.5㎝. 사진 김광섭. /필경재

1794년 방화수류정 완공 당시 명필 조윤형이 쓴 현판 글씨 원본. 전체 가로 185㎝, 세로 47.5㎝. 사진 김광섭. /필경재


경기도 수원 화성에는 ‘방화수류정’이라는 누각이 있다. 화성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독창적인 건물이라 보물로 지정됐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1794년 이 건물이 완공되자, 당대 명필 조윤형(1725~1799)에게 현판 글씨를 맡겼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니는 정자’라는 뜻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다섯 자가 호방한 필치로 완성돼 누각 위에 걸렸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에도 이 현판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현판은 사라졌고, 지금 이 정자엔 1956년 원곡 김기승(1909~2000)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

보물로 지정된 방화수류정 외관. /국가유산포털

보물로 지정된 방화수류정 외관. /국가유산포털


사라졌던 18세기 ‘방화수류정’ 현판 글씨의 원본이 조선 왕실 후손 집안에서 발견됐다.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후손의 집안인 필경재(必敬齋)에서다. 한 글자 크기가 가로 37㎝×세로 47.5㎝. 다섯 자를 합하면 전체 길이가 185㎝에 이른다. 이병무 필경재 대표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유물인데 한지에 한 자씩 쓴 글씨가 워낙 커서 낱장으로 보관돼 있었다”며 “수원 화성에 있는 방화수류정의 현판 글씨인 줄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이 대표는 “집안에서 광평대군 탄신 600주년을 기념해 필경재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를 준비하던 중 전문가에게 자문해서야 알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을 찍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을 찍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1920년대 촬영한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 사진. 정조 때 완공 당시 조윤형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독립기념관 소장. /수원화성박물관

1920년대 촬영한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 사진. 정조 때 완공 당시 조윤형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독립기념관 소장. /수원화성박물관


조윤형은 정조 때 명필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당대 궁궐 편액은 물론 화성의 주요 건물 현판 글씨를 썼다. 방화수류정 글씨는 굵은 획이 우람하면서도 이름의 뜻처럼 여유와 운치가 흐른다.

수원화성박물관은 “자료를 검토한 결과 1920년대 방화수류정 사진 속 현판과도 정확하게 일치하고, 18세기 조윤형이 쓴 현판 글씨의 유일한 원본으로 문화유산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밝혔다. 김세영 수원화성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방화수류정 원본 현판을 탁본한 글씨로 보인다. 탁본이란 원본 현판의 글씨에 먹물을 입혀 종이에 그대로 찍는 것으로 원본 현판과 거의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며 “조선 시대 왕실에서도 중요 건축물의 현판은 탁본해 수장했다”고 말했다.

이 글씨는 현재 ‘필경재가 간직한 600년: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서울 강남구 밀알미술관 운보홀에서 27일까지 열린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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