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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국민의 슬픔과 싸우지 않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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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다양한 소송을 한다. 범죄, 조세, 경제규제 같은 영역에서 공공성을 침해하는 민간 행위자들을 상대로 한 소송의 승률은 국가의 질서 유지 능력을 표상한다. 하지만 그 유능함은 때로는 과거의 국가폭력에 희생된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도 발휘된다. 가해 사실을 일단 부정하고, 피해자에게 귀책 사유가 있음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입증 책임을 다투고, 기계적 항소를 거듭하면서 일그러진 소송을 이어간다.

국가가 피고가 되어 국가책임을 부정하는 소송의 대표적 예는 형제복지원 수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다. 형제복지원 불법 수용 사건은 1970~1980년대 발생했다. 당시 소년의 나이였던 피해자들은 이미 60~70대에 이르렀다. 2021년에 일부 피해자들이 제기한 국가배상 청구 소송은 1심에서 피해자들이 승소했지만 정부가 항소해 2024년에 항소심이 완료되고 2025년 3월에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지난주인 7월7일에는 정부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인 부산시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도 나왔다.

소형 상점들에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하라는 법률에도 불구하고 시행령을 적절하게 개정하지 않은 부작위에 대해 정부를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 소송도 유사하다. 이 소송은 2018년 제기돼 2024년에 비로소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20년 넘게 이어진 정부의 부작위 책임을 확인하는 데에만도 7년이 걸린 셈이다.

이런 소송들의 핵심은 추상적으로 말하면 ‘지연된 정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한 번뿐이라는 사실이다. 형제복지원 소송의 경우 정부는 지속적으로 패소했음에도 항소했고, 장애인 접근권 소송의 경우 정부는 1·2심에서 승소할 만큼 유능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관련된 소송들을 기다리다가 피해자들은 중년에서 노년이 된다. 한 형제복지원 피해자는 1심 판결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떴다. 정부 측 담당자와 변호인, 판사에게 이 소송은 그저 잠깐의 업무지만, 당사자들에게 이 소송은 인생이 되어버린다.

정부가 슬픔을 당한 국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패소에 거의 자동적으로 항소하는 행태는 스스로 1심과 2심의 권위를 훼손하고 법원에 부담을 가하며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 심지어 유사한 소송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정책의 차원에서 민주적 원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이슈들이 사법적 판단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지연되는 것이다. 정치의 사법화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피해를 입은 국민들을 상대로 정책이 아니라 소송이라는 싸움을 선택하는 것은 정책의 사법화이다.

정부가 막대한 소송 비용을 지출하고 유능할 수 있는 이유는 시민들이 세금을 통해 국가 능력을 확보할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능력으로 오랫동안 소외되어온 국민들의 권리를 법률대리인을 통해 부정하는 소송을, 그것도 1심에서 패소한 소송을 2심·3심까지 끌고 가는 행동에서는 관료주의적 관성 외에 무슨 대단한 공익이나 명예를 찾을 수 없다. 많은 예산이 투입될 선례가 될까 두렵다는 논리는 국가의 폭력이 얼마나 만연했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정부는 국가권력의 피해자들, 여전히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과의 소송을 자제해야 한다. 1심 판단을 받아볼 때는 국민과의 승부가 아니라 법적 사안들을 공적으로 검토받는 과정으로 삼고, 항소가 아니라 정책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정부가 승소해도 마찬가지다. 끝끝내 국민을 현재의 법리로 이기려 하기보다 미래를 지향하는 정책을 통해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피해자들이 절망적인 마음에 차라리 소송을 택하려 하지 않을 정도로 실질적인 보장과 명예 회복을 동시에 담아야 한다.

오는 16일에는 새 대통령이 이 땅에서 벌어진 참사 피해자 유가족들과 만난다. 위로의 말들과 추상적 약속을 넘어 실질이 필요하다. 현재 국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이 진행하고 있는 이런 소송들을 재검토하고, 항소 결정에 다양한 관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미 문재인 정부에서는 유서 대필 사건, 지난 정부에서는 인혁당 사건 및 제주4·3 사건 관련 소송에 항소 포기를 결정한 바 있지만 불행히도 정권 초기 상징적 몸짓에 머물렀다. 새 정부는 제도화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피해자들에게 국가는 정의의 마지막 보루다. 정의는 법에만 있지 않다. 너그러움과 신속함, 소통 역시 국가가 구현할 수 있는 정의다. 정치와 법치의 두 기둥에 기반해 작동하는 입헌국가는 피해자들의 호소에 반응해야 한다. 소송이 아니라 정책으로 반응해야 한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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