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엡스틴’이 산 ‘트럼프’ 흔드나…마가 내부 “40석 잃을 것”

미국 법무장관 팸 본디가 지난달 27일 워싱턴 디시(D.C.) 백악관 내 프레스 브리핑룸에서 발언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법무부가 ‘제프리 엡스틴 사건’과 관련해 ‘유명 인사 고객 명단’ 등 공개할 문건이 없다고 발표한 뒤 ‘마가’ 진영 내에서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발표를 주도한 팸 본디 법무장관 해임 요구로까지 번지자 트럼프 대통령이 본디 장관을 강하게 옹호하는 글을 올렸지만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마가 진영 내에서는 “트럼프 정권이 정치적 자해 수준의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며 “내년 중간선거에서 40석을 잃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각)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내 ‘사람들’이 모두 본디를 공격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마가 팀이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완벽한 행정부를 ‘엡스틴’ 같은 사람 하나로 흔들게 둘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엡스틴 문건은 오바마, 힐러리, 코미, 브레넌, 바이든 행정부의 범죄자들이 만든 것”이라며 “이제 소위 ‘내 친구들’마저 그들의 전략에 말려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본디에게 일을 맡겨라. 그는 훌륭하다. 엡스틴 같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인물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며 “연방수사국은 선거 사기, 정치 부패, 2020년 조작된 대선 수사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란의 발단은 지난 7일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이 공동으로 발표한 2쪽짜리 메모였다. 해당 메모는 엡스틴이 2019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냈고, ‘유력 인사 고객 명단’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수많은 유력인사들과 교류한 백만장자 엡스틴은 미성년자 상습 성착취 혐의로 체포됐다가 2019년 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문에 재판이 열리지 않아 증거들이 공개되지 못했다. 마가 진영은 엡스틴 인맥 중 민주당 쪽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점 등에 근거해 그의 고객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를 막기 위해 엡스틴이 ‘제거’되었으며 법무부, 연방수사국, 중앙정보국 등 ‘딥 스테이트’가 이를 은폐하고 있다는 게 ‘엡스틴 음모론’의 핵심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해 대선 때 엡스틴 사건과 관련 기밀 문건을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본디 법무장관은 지난 2월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엡스틴 고객 리스트가 내 책상 위에 있다”고 말해 수개월간 기대를 키워왔다.

발표 이후 마가 진영은 폭발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보수단체 터닝포인트유에스에이(USA)가 이날 플로리다 탬파에서 주최한 마가 진영 청년 결집의 장인 ‘스튜던트 액션 서밋’ 현장에서는 본디 장관 해임 요구가 빗발쳤다. “본디냐, 본지노냐”는 질문에 수천 명의 참석자들은 일제히 “본지노”를 외쳤다. 엡스틴 음모론을 설파해왔던 보수 팟캐스터 출신인 연방수사국 부국장 댄 본지노는 본디 장관의 문건 처리 방식에 격분해 사임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본지노는 11일 하루 휴가를 냈으며, 복귀 여부는 불투명하다. 폭스뉴스 진행자 로라 잉그래햄이 “엡스틴 수사 결과에 만족하는가”라고 묻자, 행사장은 거센 야유로 가득 찼다.

터닝포인트유에스에이 창립자 찰리 커크는 워싱턴포스트에 “젊은 남성 유권자들의 열정이 꺼질 수 있다. 이는 중대한 위험”이라며 “엡스틴 사안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누가 우리를 지배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이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도 “엡스틴 건은 단순한 소아성애자 사건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통치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며 해당 문제로 마가 지지층의 10%를 잃게 되면 공화당은 2026년 중간선거에서 40석을 잃고, 대선에서도 패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보수 논객 알렉스 존스는 자신의 방송에서 “이렇게까지 트럼프 정권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정치적 자해와 같다”며 “완전한 재앙이다. 트럼프와 그의 법무부가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 이제 은폐의 일원이 된 셈이다”라고 말했다. 친민주당 성향의 팟캐스트 ‘팟 세이브 아메리카’ 진행자 중 한명인 토미 비에터는 방송에서 “마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인사가 ‘트럼프 연합은 이번 일로 분열 직전이다. 마가 운동 전체가 곧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라고 전했다”라고 말했다. 시엔엔(CNN)은 “트럼프 대통령 참모들이 본디 장관을 강하게 비판한 인사들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비판 수위를 낮춰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김원철 특파원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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