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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의 팬 사인회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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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나인 인 원’의 멤버 ‘강하’란 가상 캐릭터로 아이돌 팬싸인회를 패러디한 코미디언 문상훈. 유튜브 ‘빠더너스’ 채널 갈무리

아이돌 ‘나인 인 원’의 멤버 ‘강하’란 가상 캐릭터로 아이돌 팬싸인회를 패러디한 코미디언 문상훈. 유튜브 ‘빠더너스’ 채널 갈무리


“아이돌을 자본주의 바깥에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보니 질문 자체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대중음악 산업은 당연히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서 자본주의적 산업이다. 아이돌은 돈을 벌려고 일하고 있고, 우리는 돈을 주고 아이돌 상품을 구매한다. 이 모든 게 너무 당연해서, 그 틀 밖에서 사고하기가 굉장히 어렵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아이돌을 소비하는 이유는 아이돌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괴리가 발생한다. 우리는 아이돌을 사랑한다. 정말 진심으로. 최애(‘최고로 애정하는’ 멤버)를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아티스트로서 존경하고, 성적으로 욕망하고, 롤모델로서 동경한다. 최애가 건강하기를 바라고, 잘되기를 바라고, 아름답기를 바라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기를 바란다.



최애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힘을, 싸워나갈 용기를, 지적인 영감을, 세상의 희망을 발견한다. 최애는 우리에게 경이로운 예술 작품을 선사하고, 그 작품들은 우리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환상을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이고,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돈의 논리를 초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돌을 사랑하기 위해 사랑의 행위를 하다 보니, 즉 ‘덕질’이라는 것을 하다 보니, 나는 내 사랑이 돈의 논리에 남김없이 포획당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 사랑을 모욕적으로 짓밟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최애 앞에서 사랑의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순간







이 산업은 만남의 창구도 상품화해서 판매하고 있다. 바로 팬 사인회라는 창구를. 나도 당연히 팬 사인회에 응모했고, 참여도 한 적이 있다. 대면 행사에도, 영상 통화 팬 사인회에도. 그러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소통’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만스럽고 괴로워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왜 그랬을까?



당연하게도 나 같은 사람은 굉장히 많을 것이다. 최애와 한 마디라도 해보기 위해 소통의 창구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그러나 최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많은 사람들과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한두 시간 깊고 진실한 대화를 나눈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팬 한 명당 2분, 기껏해야 3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 2, 3분의 시간을 원하는 사람도 아주 많고, 수요가 많으니 당연히 가치가 올라간다. 시장의 논리에 따라 아이돌과의 2, 3분간의 소통에 매겨지는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적게는 몇십만 원, 많게는 몇백만 원까지. 몇백만 원을 들여 누군가를 만나서 2분 동안 말을 주고받는 것, 이것을 과연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 우리가 그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말다운 말을 주고받기나 하나? 여기에 사랑은 어디에 있나?



나는 누군가와 만나는 시간을 돈 주고 산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아닌 방법으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돈을 내지 않으면 나를 만나주지 않을 사람과 돈을 매개로 만나서 대화할 때, 그 자리에서 나는 구매자가, 상대방은 판매자가 되고, 그러면 결국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모조리 상품이 되는 것 아닐까? 그것은 나와 상대방의 인격이라는 것이 말살되는 현장이 아닐까? 사랑을 위해 만난 두 사람이 도리어 사랑의 철저한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사건이 아닐까?



팬 사인회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순환하는 절차 속에 나 자신을 끼워넣으면서, 내 앞 사람이 내 최애에게 애교를 시키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 내 사랑이 앨범 몇 장이라는 단위의 돈으로 환산되어 짜부라지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성산업의 수많은 구매자들 중 한 명처럼 전락한 기분이 들었고, 나를 그렇게 전락시키는 최애가, 나와 몇 마디밖에 나눠주지 않고 떠나는 최애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최애가 미워지기도 했고, 이런 미움을 느끼는 나 자신도 미웠고, 그 모든 것이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선사했다.



한겨레 누리집 ‘오늘의 스페셜’ (https://www.hani.co.kr/arti/SERIES/3268?h=s) 코너에서 이어집니다.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는?



여기, 케이팝과 함께 자란 이들이 있다. ‘최애’가 몇 번 바뀌는 동안 케이팝은 세계 음악 시장을 흔드는 장르가 되었고 국익을 거론하는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장밋빛 전망’만 가득할까? 물음표가 남는다. 기획사는 수익에만 매달리고, 팬덤은 덕질을 가장한 노동으로 지쳐간다. 사건사고도 반복된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는 케이팝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대안을 함께 고민한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



지속가능한 케이팝의 미래를 위한 더많은 담론을 아래 링크에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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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들은 툭하면 ‘빠순이’의 뒤통수를 때린다 (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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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밀 소설가, 번역가, 에세이스트이자 여자 아이돌 팬. ‘로드킬’, ‘너라는 이름의 숲’,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사랑, 편지’ 등을 썼다.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는 ‘케이팝 하는 여자들’과 ‘들불’, 한겨레가 공동 기획한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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