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정원 국제공모에서 금상을 받은 김기한 작가의 ‘더 라스트 밀(The Last Meal) |
“머위 아니야?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데쳐서 쌈을 싸 먹거나 나물로 무쳐 먹는 ‘머위’를 알아본 중년 관람객의 목소리는 희귀한 꽃을 발견한 것만큼 들떴다. 어둠이 내리고 조형물 아래 조명이 켜지자 낮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정원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났다. 가로등이 켜지는 오후 8시. 30도를 넘겼던 기온은 27도로 떨어졌다. 이따금 제법 시원한 바람마저 불어온다. 여름밤 정원의 매력에 빠지기 좋은 시간이다. 지난 3일 저녁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이하 국정박)가 한창인 보라매공원을 찾았다.
오랜 플라타너스 길도 정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양희 오세훈 작가의 ‘제3의 플라타너스 숲(The Third Platanus Forest)’ |
참신한 굿즈로 ‘힙’해진 국립중앙박물관이 ‘국중박’으로 불리듯, 지난 5월22일 개장한 ‘국정박’도 공원 내 벤치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람객이 몰렸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은 국정박은 그동안 월드컵공원, 여의도공원, 뚝섬한강공원 등지에 공공 정원을 조성해왔다. 약 40만㎡의 보라매공원 곳곳에 자리한 111개의 정원 중 어디를 먼저 찾으면 좋을까. 올해 국정박의 행사 연출과 프로그램 기획을 맡은 이가영 부감독에게 가이드를 요청했다. 그는 서울가드닝클럽 대표로 도심 속 공유정원의 가치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부감독의 첫 번째 추천 정원은 “기존의 정원에서 보지 못한 접근을 한 개구리밥 정원”이다. 머위가 심어진 바로 거기다.
오후에는 다른 느낌을 내는 ‘더 라스트 밀(The Last Meal). |
“개구리밥을 통해 미래 식량 자원으로의 접근을 시도해 생산성 높은 정원으로서의 가치를 담아낸 작품이에요. 기후위기나 생태주의적 관점이 정원계에서도 화두인데, 이 작품은 접근 방식부터 획기적이면서도 정원의 가치를 신선하게 풀어냈어요.”
- 이가영 부감독
작가정원 국제공모에서 금상을 받은 김기한 작가의 ‘더 라스트 밀(The Last Meal)’은 “육식 문화가 조장하는 생태적 붕괴 상태에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자연의 생명력과 회복력을 상기”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개구리밥의 식량 자원화를 추진하는 연구팀과 협업했다. 토란, 창포, 고사리 등 식용 식물을 활용했다. 정원의 개념이 이렇게나 확장될 수 있다는 좋은 예로 삼을 만하다.
태양의 기세가 잦아들면 보라매공원으로 시민들이 하나 둘 모여서 트랙을 채운다. |
40년 된 보라매공원은 국정박을 통해 달라졌다. 노후화된 플라타너스 길은 각각의 소담스러운 미니 정원과 벤치, 테이블이 마련돼 운치 있는 휴식 공간으로 변신했다. 민트색 디자인 벤치에서 쉬거나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관람객들도 보였다.
이 부감독은 “111개 정원을 새로 만들었지만, 기존 공원 공간을 해치는 과도한 구조물이나 벽 등은 최대한 자제하고 자연주의적인 식재 위주로 편안한 공간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정원마다 과시적인 표지판이 붙어있지 않아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사부작사부작 돌아보는 묘미도 있다. 이른바 ‘K조형물’로 희화화되곤 하는 인위적인 ‘포토존’이 없는 것도 눈을 편안하게 한다.
보라매공원에서 구한 재료로 만들어한 거대한 둥지 모양의 정원 ‘네스팅(Nesting)’ |
거대한 둥지 모양을 한 ‘네스팅(Nesting)’은 나뭇가지와 나뭇잎 등을 쌓아 올려 자연스럽게 부패시키는 독일의 전통적인 기법 휴겔쿨투르로 만든 정원이다. 다른 작가들이 “콘크리트 기초를 쳤다”는 식으로 공사 현황을 보고할 때, 이 공원을 조성한 독일과 체코 출신 작가들은 “나뭇가지를 10% 주웠다”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보라매공원에서 수집한 재료로 일군 이 정원은 머지않아 이끼가 끼고 버섯도 자라면서 공원의 일부가 될 예정이다.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정원 애호가의 즐거움이 되겠다.
해 질 녘 서귀포시 정원을 돌아보는 이가영 부감독. |
제법 어둑해지자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음악분수가 있는 연못 주위로 피서객이 제법 모였다. 맨발광장 인근에서 이 부감독이 발걸음을 멈췄다. 지자체 정원 초입에 자리한 ‘서귀포시 정원’이다.
“제주 1100고지의 자연경관을 모티브로 삼아 만들었다고 해요.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땅을 파서 입체감 있게끔 완성했어요.”
평범했던 공원 화단이 정원가의 손을 거쳐 제주도를 축소해 담은 듯한 이색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야간 조명을 받은 정원은 곶자왈 원시림의 미니어처를 보는 듯하다.
“꽃 하나 없는 정원이라도 잎사귀가 띠고 있는 초록의 톤과 질감, 광택 등의 차이와 개별성, 그런 다채로움을 느끼시면 좋겠어요.”
부산을 상징하는 요소로 채워진 부산의 자연 정원에서 더위를 식히는 시민들. |
다음 정원을 찾아가는 길, 이 부감독은 여름밤의 온도, 습도 그리고 향기를 예찬했다. 이윽고 닿은 곳에는 두 번째로 추천한 지자체 정원이 있었다. 파도의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이기대의 해안 지형을 고스란히 재현한 조형물, 연못과 맞닿은 모래사장, 바위틈에서 자라는 식물, 여름 동백이라 불리는 꽃을 피워내는 노각나무까지 영락없는 ‘부산’의 자연 정원이다. 정원으로도 여행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 부감독은 백사장에 놓인 의자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숲속 무대에서는 수준 높은 공연도 즐길 수 있다. |
이른 저녁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 울려 퍼지는 숲속 무대를 지나 독일 마크 크라이거 작가의 애비에이터스 가든(Aviators Garden)에 당도했다. 잔디마당 왼편 구역에 조붓한 오솔길을 품은 다년생 식물로 꾸며진 미니 정원이 펼쳐져 있다. “분주함 속 조용한 오아시스”를 만들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독일 마크 크라이거 작가의 애비에이터스 가든. |
“아마 봄에 보신 분들은 ‘뭘 이렇게 헐하게 심었어’라고 했을 수 있는데, 지금은 이 식재의 층이 보이잖아요. 작가님은 식물이 다음 계절에 얼마만큼 자라는지를 이미 계산했거든요. 앞 열의 식물이 절묘하게 뒤를 가리지 않죠? 또 보라색 버들마편초 사이로 흰색 실유카가 반짝 특별출연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요. 정원을 만드는 건, 시간의 예술이에요.”
가운데 벤치에 앉으면 이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
이 부감독은 정원 디자인을 무대 디자인에 견주었다. 여름의 주인공이 빛을 발한 뒤에는 가을의 주인공이 배턴을 이어받는다. 그는 “작가들이 계절의 변화를 다 감안해 만든 정원인 만큼 계절마다 와서 보는 것도 감상 포인트”라고 조언했다. 올해 국정박은 예년에 비해 길어 오는 10월20일까지 열린다.
보라매공원 내 연못으로 하나 둘 모여드는 시민들. |
마지막으로 이 부감독의 올해 ‘최애’ 정원에 이르렀다. 잔디광장을 중심으로 타원형 트랙의 동쪽에 자리한 박승진 작가의 ‘세 번째 트랙’이다. 동네 주민이라면 느티나무와 이팝나무가 몇 그루 있던 잔디밭으로 기억할 자리에 작은 비밀의 숲이 생겼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길에 한 발 내딛는 순간 다른 세계가 열린다. 바로 옆, 보라매공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트랙에서 ‘밤 운동’을 나온 시민들이 분주하게 시계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음에도.
박승진 작가의 ‘세 번째 트랙’ 옆으로 열심히 밤운동 중인 시민들이 지나간다. |
“공원 내 천천히 걷기와 빠르게 걷기 트랙을 도시의 속도라고 한다면, 다른 시간의 속도로 좀 더 느긋하고 여유롭게 정원을 즐기라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해요. 교목을 식재한 폭이 그리 넓지 않은데도 마치 깊은 숲에 들어온 것처럼 폭 감싸 안겨지는 듯한, 다른 공간감이 들죠.”
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세 번째 트랙’. 그 온도차를 느껴보는 묘미가 있다. |
생강나무꽃, 히어리꽃, 산목련이 진 자리에 낙상홍, 개회나무가 여름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이 부감독에 따르면 도심 환경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들이 의도적으로 다양한 층을 형성하며 자라도록 꾸몄다고 한다. 그는 이를 ‘작가의 내공’이라고 표현했다.
잠도 오지 않는 여름밤. 초청정원, 공모정원, 기업정원, 기관정원, 시민정원 등 111개의 정원 중 내 맘을 사로잡을 정원을 찾아보면 어떨까. 주최 측은 8월까지 행사 운영 시간을 오후 2~9시로 조정했다. 오후 9시가 넘은 시각에도 공원을 찾는 발걸음은 이어졌다. 여름 정원의 ‘쇼타임’은 해 질 녘부터다.
작가정원 동상작 워터루츠(Waterrooots)의 밤 풍경. |
작가정원 동상작 워터루츠(Waterrooots)의 낮 |
장회정 선임기자 longcut@kyunghyang.com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주 3일 10분 뉴스 완전 정복! 내 메일함에 점선면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