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6일, 한국 출발 12일 만에 아일랜드 항공 보잉 여객기를 타고 남극의 유니언 빙하 위에 착륙했다. /김영미 제공 |
킹펭귄이 전해 준 행운의 시그널에 남극이 화답했다. 하지만 남극으로 들어가는 아침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들뜨지 않는다. 아침 6시에 맞춰 둔 알람보다 몇 분 먼저 깼으나 눈을 감고 다시 누웠다. 남극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함께하려고 동행한 슬비가 노크를 하며 한 번 더 나를 깨운다. “응-!” 침대에서 겨우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침대도 오늘이 끝이네!’ 몇 분을 더 뭉개다 침대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하얀 김을 뿜으며 뜨끈한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오늘 남극에 가면 80일 가까이 씻을 수 없어.’ 피부에 닿는 따스한 온기를 1분이라도 더 몸에 새기고 싶었다. 뜨거운 물이 온몸을 휘감는데, 곧 마주하게 될 빙하 위의 저릿한 한기의 기억이 등줄기를 긴장하게 한다. ‘이런 호사도 마지막이군!’ 여유 있게 출발하고 싶었는데, 안락한 것들에 미련이 남았는지 행동이 굼떴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전날 챙겨둔 남극행 옷을 갈아입고 나니 공항까지 나를 태우러 온다는 버스 시각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슬비가 저녁에 먹고 남은 피자를 두 번이나 데워 줬는데 한 조각도 다 먹지 못하고 숙소를 나왔다. ‘남극의 아침은 훨씬 전투적으로 시작되겠지!’
푼타아레나스(푼타)에서 남극까지 충분히 가까워졌지만, 여기부터 남극을 향하는 여정은 또 다른 기다림의 연속이다. 착륙하게 될 남극의 날씨가 허락돼야 비행기가 뜨기 때문에 바람과 화이트아웃(눈보라 등으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2년 전에도 푼타에서 14일이나 대기했다. 2003년 박영석 대장님의 남극점 원정대는 공항 검색대까지 통과해 온종일 대기만 하다가 저녁에 숙소로 되돌아간 적도 있다고 했다. 남극 물류 항공 대행사(ALE)는 하루에 4번 정도 남극의 기상 상황을 전달하며 출발의 긍정적 확률을 예고했다. 이 비행기는 ALE의 ‘남극 전진 캠프’라고 할 수 있는 ‘유니언 빙하’에 착륙한다. ALE는 남극의 여름인 백야 기간 약 100일 동안 유니언 빙하에 캠프를 운영한다. 나는 유니언 빙하에서 출발지인 허큘리스 인렛으로 한 번 더 경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2024년 11월 6일, 드디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해 여권에 칠레 출국 도장을 찍었다. 푼타는 국내선 공항이지만, 남극으로 가는 비행은 국제선 규정에 따른다. 2004년 남극 최고봉 등반을 왔을 땐, 드럼통과 함께 짐 속에 섞여 러시아제 ‘일류신’이라는 화물 항공기를 탔다. 남극행 수요가 많이 늘었는지 보잉 여객기로 업그레이드됐다. 실제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그 수요가 더 증가했다고 한다. 환율 상승과 유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에도 수요가 늘었다니 놀랍다.
캠프 설치팀 26명을 실은 첫 비행기의 탑승객은 단출하다. 나를 포함해 단독 횡단을 하겠다는 인도 출신 미국 남자 한 명뿐이다. 푼타를 출발한 지 2시간 30분 만에 창밖으로 남극의 하얀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평생 한 번도 밟기 힘든 남극이 벌써 세 번째다. 20년 전 처음 남극의 얼음을 밟았을 때 가장 놀랐던 건 눈부신 태양이었다. 한 번도 자극받아 보지 못했던 강한 빛에 당황해 선글라스 위로 스키 고글을 한 겹 더 씌웠었다. 비행 4시간 만에 여전히 눈부신 유니언 빙하 위로 착륙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 한 점 없다. 낮은 기온에 코털이 들러붙는다. 깊이 들이마신 찬 공기가 폐부를 훑더니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남극이다. 이제야 마음이 들뜬다. 덩치 큰 비행기도 밀어내는 거친 바람 속을, 이제부터 혼자 뚫고 걸어 들어가야 한다.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인지라 인간이라는 자연이 남극이라는 대자연에 다가서는 긴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국 출발 12일째 되는 날이다.
※한국인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김영미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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