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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아닌 무너짐의 이야기”···여름이 지나면,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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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름이 지나면> 장병기 감독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에서 영문(최현진)과 영준(최우록) 형제가 스쿠터를 탄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에서 영문(최현진)과 영준(최우록) 형제가 스쿠터를 탄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재개발이 시작되려는 한 소도시. 일탈하는 아이들이 있다. 중학생 영문(최현진)과 초등학교 6학년 영준(최우록) 형제는 동네에서 유명한 문제아다. 영문은 폭력과 카리스마를 내세워 물건이나 돈을 빌리는 척 뜯어내고, 영준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건을 훔친다. 형제의 엄마는 3년 전에 죽었다. 아빠는 누구인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형제를 안타까워한다.

서울에 살던 기준(이재준)은 어느 날 영준의 반으로 전학을 온다. 입시의 농어촌 특별전형과 부동산 재개발이라는 1타2피를 노리는 엄마 때문에 지방으로 끌려온 그는 새 동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마는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반에 햄버거를 돌릴 정도로 기준에게 관심이 많다. 뭐든 심드렁하던 기준은 왜인지 영준·영문 형제에게 눈이 간다.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의 장병기 감독이 8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의 장병기 감독이 8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장병기 감독(39)의 장편 데뷔작 <여름이 지나가면>은 형제와 가까워진 기준이 사회가 그어놓은 선을 넘나들며 생기는 일을 그린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등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2025년 독립영화계 최대 기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둔 지난 8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장 감독을 만났다. 그는 “성장이 아닌 무너짐에 대한 이야기”라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답이나 좋은 해결이 있을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차가운 영화”라고 <여름이 지나가면>을 설명했다.

어른들과는 또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아이들의 세계 속 서열·친구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파수꾼>(2011·윤성현 감독), <우리들>(2016·윤가은 감독)이 자연히 연상된다. 차별점은 영문·영준 형제와 기준 사이에 사회경제적 격차가 선명히 그어져 있다는 것이다.

함께 나쁜 짓을 해도 결괏값이 다르다. 기준은 형인 영문을 내심 동경하며 물건을 훔치는 등 비행에 가담한다. 그래도 그에겐 모든 일을 ‘한여름의 일탈’로 만들어 줄 적극적이고 부유한 보호자가 있다. 세상에 둘뿐인 형제는 때론 생계를 위해 위악을 떠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사회 안전망 끄트머리에 겨우 걸쳐 있는 그들을 끝까지 변호해 줄 이는 없다. 영화는 기준과 동네 사람들의 시선으로 형제를 바라보며, 이 간극을 서늘하게 비춘다.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 속 기준(이재준)은 영준(최우록)의 형인 영문(최현진)을 내심 동경하게 된다. 이따금 폭력을 휘두르는 영문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문제아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 속 기준(이재준)은 영준(최우록)의 형인 영문(최현진)을 내심 동경하게 된다. 이따금 폭력을 휘두르는 영문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문제아다. 엣나인필름 제공


장 감독은 유년 시절 자신이 기준에 가까웠다고 했다. 일본 학원물 만화나 하드보일드 소설 속 권력 추구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비행 청소년들은 그에게 불가해한 존재였다. 장 감독은 “그 무리의 아이들은 부지불식간에 화를 내곤 했는데, 그 갑작스러운 감정의 작동 원리를 모르겠더라”고 말했다.

몇 편의 독립 영화를 만든 30대 초중반, 영화를 마치면 빚이 늘었다. 단기로 건설 현장을 찾거나 반도체 공장에서 배관 일을 하며 다음 영화를 준비했다. 장 감독은 그때 ‘그 화가 많던 아이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저는 사회적으로 영문이의 위치에 가깝거든요. 사회에서 마이너한 위치가 된 후에야 이런 환경에서라면 (갑자기) 화를 낼 수도 있겠구나, 알게 됐죠.”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의 장병기 감독이 8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의 장병기 감독이 8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다만 폭력을 미화해선 안 된다는 원칙이 먼저였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기 전후 영문과 일당의 태도를 보여주면서도 직접적인 행위는 점프 컷으로 넘기거나, 화면 바깥에서 처리한다. “누군가에겐 폭력 장면을 장르적으로 멋있는 표현이라 여길 수 있으니, 그런 장면은 넘어가고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고) 불편해하는 반응을 담았습니다.”


영화 속 소도시는 매정한 곳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다. 마을 주민들은 형제가 집에 찾아오면 기꺼이 함께 밥을 먹는다. 둘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던 기준의 엄마도 사정을 알고 난 뒤엔 기준에게 “어려운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돼라”고 말한다. 영문이 매번 내쫓는데도 복지센터 사람들은 점검 차 그들의 집을 찾는다.

<여름이 지나가면> 속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아이들과 함께 모여 있다. 이들의 시선 끝엔, 영문과 영준 형제가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여름이 지나가면> 속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아이들과 함께 모여 있다. 이들의 시선 끝엔, 영문과 영준 형제가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장 감독은 “그 온정들은 위선이 아닌 다 순수한 진심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다만 연민이나 동정이 무조건적이지 않다는 거다. ‘적어도 내 아들은 건들지 말라’는 식의 조건이 붙는 것”이라고 했다.

여름의 일탈이 끝나고 무너지는 쪽은 정해져 있다. 장 감독은 ‘더 이상 축구를 하지 않는 아이들’이라는 문장으로부터 영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축구’란 단어는 즐거운 것, 어울려 노는 것, 더불어 살아가는 것으로 대치될 수 있다. 축구도 여름도 끝난 뒤, 이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마을 사람들은 영문·영준 형제를 보며 “참 어려운 문제”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장 감독은 이 영화가 그 말대로 관객에게 ‘어려운 문제’로 남기 바란다고 했다. “관람 후, 할 말이 아주 많으면서도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영화 속 아이들이 오래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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