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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은 무엇과 같습니까?’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저들은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노는 어린아이들과 같도다.’ 땅 주인들이 와서 이르되, ‘우리 땅을 되돌려 달라’ 하니, 그 어린아이들은 땅 주인 있는 데서 자기의 옷을 벗고 땅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느니라.(도마복음 21-1)
예수의 제자들은 땅 주인(에고)이 와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달라고 하면 어린아이처럼 분별시비를 벗어나서 기꺼이 내어준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아무것에도 집착(욕망)하지 않는 자’만이 자신이 주인이 되는 하나의 신성한 성품(참나)을 회복한다. 구원(천국)은 ‘자기 옷’(에고)을 벗어 던지듯이 이원적 사유를 버리고, 하나의 신성(참나)이 드러나는 현재적 사건이며, 시간의 종말적 사건이 아니다. 누구나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 등의 이원성으로 상징되는 자기의 옷(거짓 나)을 벗어 던지는 순간 천국(참나)의 환희를 체험하게 된다.
성경의 마태(24:5-8), 마가(13:30), 누가(21:8)는 세상의 종말을 묘사하고 있지만, 도마복음에는 시간의 종말에 관한 구절이 없다. 시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진리의 관점에서는 시간의 종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의 날은 죽은 후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며, 제 목숨(에고)을 버리고, 신성한 성품(참나)을 찾는 자리이다. 이때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자각한다(사도행전 17:28). 우리는 천국의 삶을 위하여 둘이 아닌 영의 ‘나’(참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이원적인 육의 ‘나’, 즉 자기의 옷(에고)에 대한 관념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옷(에고)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현상계가 본래 있지 않은 허상이며, 텅 빈 공(空)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과 슬픔을 당한다. 공(空)의 정체가 생명(진리)임을 자각한 성자들은 다만 이원적으로 가려서 선택하지 않고 하나로 봄으로써 범부들과 차별이 된다(신심명). 불경에서는 생사, 주객 등의 이원성이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보니 한 물건도 없구나’(증도가)라고 노래하였다. 성자는 만물과 더불어 한 몸이 되며(도덕경 38장), 모든 종교의 바탕은 ‘자연과 인간이 한 뿌리요 한 몸이다’라고 하는 ‘하나의 자리’이다.
바울은 자기의 옷(에고)을 벗고, 그리스도(참나)를 깨달은 경지를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고 하였다. 깨달음으로 천국(열반)에 드는 것은 신(부처)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시간적으로 미래의 끝이 아니다(대승기신론). 예수는 ‘모두가 다 하나다’(요한복음 17:21)라고 하는 하나의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셨다. 부처도 깨달음으로 성도(成道)했을 때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 초목과 국토가 모두 여래의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하나의 진리를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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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카르트는 내면의 신적인 불꽃 체험을 ‘돌파’라 하여 ‘돌파력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동일함을 발견한다’고 하였다. 신과 동일한 ‘나’(참나)는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그리고 플로티누스의 일자에 해당한다. 내면의 신성한 성품(참나)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육적 자아인 자기의 옷(에고)을 벗기고, 영적 자아(참나)인 불생불멸의 신성(불성)을 자각하게 된다. 예수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낫게)하였다’(누가복음 8:48)고 말씀하신 것은 내면에 있는 신성(참나)의 치유력을 스스로 믿게 하신 것이다.
분별, 집착하는 자기의 옷(에고)을 벗고 시공간을 초월한 영의 ‘나’(참나)를 자각할 때 고통과 불행은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고통을 일으키는 이원적인 육의 ‘나’(거짓 나)는 시공간 안의 허상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한복음 8:58)고, 부처가 ‘달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여래 또한 이제껏 태어난 일이 없고 죽는 일이 없다’(열반경)고 한 것은 하나의 진리(참나)를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는 ‘누가 나의 어머니인가?’(마가복음 3:33)라고 하셨다. 예수 자신은 부처처럼 결코 태어나지 않은 무한한 진리(참나)이며(무시무종·無始無終), 유한한 육신(거짓 나)은 무익하다는 것이다(요한복음 6:63).
따라서 예수는 ‘모두가 다 하나다’(요 17:21)라고, 장자는 ‘도(道)에서는 하나로 통한다’(도통위일·道通爲一)고 한다. 만유는 하나의 생명으로 충만하며, 모든 것은 인연으로 된 하나의 생명이다(연기법). 모든 고통, 슬픔, 미움 등은 어린아이처럼 이원적인 ‘자기의 옷’(ego)을 벗어 던지고, 초연하게 되는 하나의 생명, 즉 신성(참나)을 회복함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 무한한 능력을 가진 내면의 신성(참나)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자기의 옷’에 대한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한다. ‘제 목숨’의 집착을 소멸하면, 하나의 신성(참나)을 회복하여 자연스러운 어린아이처럼 삶을 재미로, 놀이로 즐기는 천국의 삶을 맛볼 수 있다. 인도의 리부 기타에서는 ‘나는 몸과 마음(에고)이 아니다. 나는 브라만(참나)이다’를 반복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모든 경전에서는 ‘에고(이원성)를 죽이고, 둘이 아닌 영원한 생명(참나)으로 부활하는 것이 구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구자만(개신교 장로·신학박사·신흥지앤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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