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정의로움이 밥 먹여주는 세상 [뉴스룸에서]

한겨레
원문보기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이 2023년 12월7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첫번째 공판에 출석하기 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이 2023년 12월7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첫번째 공판에 출석하기 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전정윤 | 뉴콘텐츠부국장





박정훈 전 해병대수사단장(대령)은 충직한 부하였다. 그는 해군사관학교가 아닌 경북대 법대를 나왔는데, ‘비사’ 출신에게 군기유지·범죄수사를 담당하는 헌병 병과 수장을 맡겼다는 건 윗선이 그를 신뢰했다는 뜻이다. 충직한 부하였던 박 대령과 관련해, 특검 수사와 재판으로 밝혀지기 어려운 한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대통령실·국방부·해병대사령부·경북지방경찰청·국가인권위원회 등 관련 기관 모든 관계자들이 ‘브이아이피(VIP) 격노’에 벌벌 떨며 사건의 은폐·무마·회유·외압에 가담했는데, 박 대령은 어떻게 홀로 끝까지 정의로울 수 있었을까. 이기적인 본성을 뛰어넘은 정의감에 대한 인간적인 호기심이 일었다.



지근거리에서 박 대령을 돕는 김태성 후원회장으로부터 실마리를 얻었다. 박 대령이 채 상병 순직 외압 의혹 사건에 휘말리기까지 몇가지 우연이 겹쳤다고 했다. 통상 수사는 1광수대장 책임하에 이뤄지고, 수사단장은 보고를 받는 정도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물에 쓸려 차마 보기 어려운 채 상병의 주검을 박 대령이 직접 마주했다. 주검을 보지 않았더라면 “너의 죽음에 억울함이 없게 하겠다”고 맹세하거나, 위에 대통령이 있다는데 요지부동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한다.



그 뒤로도 박 대령이 이 사건을 비켜갈 기회는 있었다. 국가안보실에 파견 나간 김형래 대령이 “대통령실에서 해병대 사건을 해병대가 수사하는 걸 우려한다”고 전화했을 때다. 박 대령이 “그럼 국방부 조사본부에서 하시라”고 했으면 될 일이었다. 어쩐 일인지 박 대령은 ‘해병대 문제니까 우리가 공정하게 할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윤석열이라는 무자비한 권력의 교만이 아니었다면, 이번 사태는 박 대령 보직 해임과 징계 선에서 끝날 수도 있었다. 박 대령도 그 정도는 각오했기 때문이다.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봐주기가 목적이라면 경북경찰청에 이첩해도 무혐의 처분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윤석열 정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박 대령에게 집단항명 수괴라는 감당 불가능한 혐의를 덧씌웠다. 박 대령이 수사 거부와 인터뷰 등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연이은 우연을 일생일대 ‘사건’으로 만든 것은 결국 박 대령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상관이었던 김계환 당시 해병대사령관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의 명령을 어기고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에게 과실치사와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하면 ‘항명’이 되고, 수사 결과를 조작해 임 사단장을 빼라고 지시하면 ‘직권남용’이 되는 상황이었다. 불의와 정의의 갈림길, 김 전 사령관은 박 대령에게 ‘브이아이피 격노설’을 언급하고 외압을 행사하는 과정에 연루된 혐의로 7일 특검 조사를 받았다. 반면 박 대령은 부하들을 허위공문서 작성 범죄자로 만들 수 없었고, 영원히 은폐할 방법도 없다고 보고 총대를 멨다.



박 대령은 권력의 눈 밖에 난 뒤 두평 남짓 사무실에서 벽만 보고 19개월을 버텼다고 한다. ‘혹시 박 대령이 묻을까 봐’ 군 내부는 물론, 30년 지기 친구들까지 그를 멀리했다. 이럴 때 항복을 선언하거나, 연금이라도 지키려 목숨을 끊는 공무원이 많다. 박 대령은 훈련소 동기생인 김태성 회장과 김신 신부 등 뜻밖의 도움들에 의지하고, 2년간 200권의 책을 읽고 기도하며 ‘눈뜨기 싫은 시간’을 견뎠다. 천주교 신자인 박 대령은 이 모든 우연과 인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우연이든 선택이든 운명이든, 그의 정의로움은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채 상병 사건은 강제징집 국가에서 부모들의 역린을 건드리고 윤석열을 직접 겨냥한 첫 사건이었다. 차기 해병대사령관이 유력했던 임성근을 끌어내림으로써 12·3 내란사태에 해병대가 동원될 가능성을 차단했으며, 비상계엄 당시 계엄군의 소극적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현재까지 박 대령에게 예정된 미래는 천신만고 끝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정도다. 그러나 ‘정의로움이 밥 먹여주지 않는 세상’에서, 제2 제3의 박정훈 대령이 되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정의로운 군인의 표상이 된 그에게 명예뿐 아니라 권력이든 금전적 보상이든 좀 더 상징적인 성공이 주어지길 바란다. 정의로운 사람의 성공이 구성원들의 다음 선택을 바꾸는 거니까.



ggum@hani.co.kr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브리지트 바르도 별세
    브리지트 바르도 별세
  2. 2한학자 통일교 조사
    한학자 통일교 조사
  3. 3박근형 이순재 별세
    박근형 이순재 별세
  4. 4김종국 위장 결혼 의혹
    김종국 위장 결혼 의혹
  5. 5손흥민 리더십
    손흥민 리더십

한겨레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