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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산 자를 돕게…‘인간존엄의 길’을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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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일간의 수감 생활 끝에 나온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 2015년 11월2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 헌화하고 있다. 천주교인권위 김덕진 제공

110일간의 수감 생활 끝에 나온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 2015년 11월2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 헌화하고 있다. 천주교인권위 김덕진 제공





“왜 그렇게 사냐고요?…이름대로 살았습니다.” 지난해 5월7일치, 이 연재 첫회의 제목이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박래군(朴來群), 그 이름대로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풀어낸 게 벌써 오늘로 60회를 맞았다. 그렇게 많은 회차를 써냈는데도 어떤 일은 건너뛰어야 했고, 어떤 이야기는 충분하게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우선은 오늘로 이 연재를 끝내니 마음은 가벼워진다. 다음주부터는 밤잠을 설치지 않고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 연재는 20대에서부터 60대의 오늘까지 대략 45년, 그러니까 내 스스로 정한 인생 3막 가운데 2막 시기의 이야기였다. 1막은 출생부터 문청의 꿈을 안고 대학 들어가던 21살 시기까지였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촌놈으로 컸던 시절부터 문학에의 꿈, 더 정확히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들어갔던 대학에서 내 인생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2막은 짧았던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시기를 거쳐서 동생의 죽음 뒤에 인권운동의 길로 이어져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다. 2막이 아직 진행 중이니 아직 인생 3막은 시작도 못하고 있다.



인생 2막의 나는 한국인권운동의 2세대 인권운동가로 살아왔다. 한국에서 인권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때 인권운동에 입문했고, 새로운 인권의 길을 개척하는 일들을 많이 해왔다. 과거의 국가범죄와 국가폭력을 고발하고,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한편으로 사회권이나 평화권과 같은 운동에도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내 스스로 ‘생명안전운동가’로 산다고 말한다.



처음엔 억울한 죽음 뒤쫓는 일
유가협 사무국장 ‘재야의 장의사’로
더 나은 세상 꿈꿨던 목소리 대변
죽어가며 외친 유언 현실화 애써

최루탄 등 폭력 가고 문화의 시대로
사회 구조적 폭력은 여전히 온존
약자들 ‘눈물의 온기’ 기억하며 살 것



2015년 4월2일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박근혜 정부가 배·보상 기준과 금액을 발표하자 세월호 유가족들은 “돈으로 능욕당했다”며 정부를 규탄하고 삭발을 감행했다. 박래군은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아 유가족들의 시위 현장에 늘 함께했다.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2015년 4월2일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박근혜 정부가 배·보상 기준과 금액을 발표하자 세월호 유가족들은 “돈으로 능욕당했다”며 정부를 규탄하고 삭발을 감행했다. 박래군은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아 유가족들의 시위 현장에 늘 함께했다.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사람을 살리는 인권운동의 길





나는 인권운동이 ‘사람을 살리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나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일로부터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의문사당한 사람들, 고문당한 사람들의 일이 내가 풀어야 할 일들이었다. 그러다가 죽은 이들이 있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서른 즈음에 나는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의 사무국장으로 ‘재야의 장의사’란 말을 들을 정도로 참 많은 죽음들을 보았고, 그들의 장례를 치렀고, 억울함을 풀기 위한 투쟁들로 바빴다. 요즘은 ‘기억’이란 말이 더 많이 쓰이지만, 그 시절에는 ‘정신계승’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한강 작가가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나는 현장에서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다. 죽어간 이들은 같이 죽자가 아니라 ‘나는 죽지만, 살아남은 당신들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런 마음으로 울고 있는, 살아남은 자들의 곁으로 갔고, 지금까지 그들 ‘곁’을 지키며 살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죽은 이들이 불쑥불쑥 나타날 때가 있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나타난다. 헛것을 보는 것일 텐데, 기일이 가까워온 시기에는 더 자주 그런다. 죽은 이들이 ‘귀신’으로 나타나 자신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왜 자꾸 헛것이 보이나 걱정도 했고, 어떤 때는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이 귀신이 되었다 한들 나를 괴롭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을 위해서 장례도 치러주고, 그들을 기억하고,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애썼는데, 귀신이 나한테 해코지할 리가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죽은 이들과 같이 산다, 귀신들이 나를 도와줄 거다’란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런 다음부터는 때가 되었는데도 그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서운하다. 그러므로 내 뒷배는 죽은 자들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없던 용기도 샘솟는다. ‘목숨 걸고 싸우다 죽기까지 한 사람도 있는데, 이깟 것’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2021년 2월6일 박래군 당시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한진중공업 복직을 요구하면서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도보행진을 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맞으며 주먹 인사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2021년 2월6일 박래군 당시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한진중공업 복직을 요구하면서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도보행진을 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맞으며 주먹 인사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나의 뒷배는 ‘귀신’ 들이다





그러므로 나의 인생은 죽은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만 그럴까?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앞서 죽어간 이들에 대한 기억들을 안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돌아보면, 내가 해온 인권운동은 죽은 자들이 죽어가면서도 외쳤던 ‘유언’을 현실에 접목해서 구체화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유언 중에는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정치적 권리, 경제적 권리, 사회적 권리, 문화적 권리 등등이 이미 들어 있었다. 존중받는 삶에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까지 권리가 억압되고, 유보되고, 은폐되는 현실의 벽을 부수려다 죽어간 이들의 유언 아닌가. 때로는 본인의 의지로, 때로는 불의의 사고나 사건에 의해서. 내 싸움은 앞서 죽어간 이들이 가르쳐준 인간존엄의 길을 따라왔던 것이다. 달리 길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월호 참사 이후에 ‘지금까지 사람이 죽고 나서 움직였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사람이 죽기 전에 움직이자. 그래야 더는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을 것 아닌가’ 하는 고민에 이르렀다.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더는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하면 할수록 지금의 체제,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매일 산업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고, 재난 참사로 인한 죽음들이 이어진다. 거기에 유난히 높은 자살률이 더해진다. 운 좋게 살아가는 너무 위험한 사회 시스템, 그 안에서 힘없는 자들끼리 각자도생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사는 시스템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인생 2막을 살아오는 동안 ‘폭력의 시대를 넘어 문화의 시대로’ 바뀌었다. 과거의 집회·시위 현장을 생각해보자. 최루탄이 자욱하게 깔린 거리에서 백골단, 기동대가 쇠파이프와 날카로운 방패로 위협하면서 공격하던 게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차벽 앞에서 물대포에 맞아서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게 1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촛불과 응원봉이 등장하고, 대중가요 리듬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떼창을 한다. 마치 콘서트장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런 문화적인 요소가 강조되다 보니 집회·시위를 하다가 연행된다는 생각은 멀어졌다.



문화의 시대에도 폭력은 있다. 구조적 폭력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직접 폭력만 사라졌을 뿐이다.(물론 아직 시민들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직접폭력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리적인 공격과 방어가 필요한 때가 아니라 문화적인 방법으로 차별과 혐오, 폭력을 넘어가야 하는 때다. 문화시대에 맞게 생명안전운동(다른 말로는 4·16운동)을 어떻게 발전시켜갈까? 4·16운동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 제기된 운동이니 새로 생겨나고 발전하는 운동이다. 이제 시작된 이 운동을 꽃피우기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





지난 5월2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생명존중, 안전사회를 위한 제21대 대선 공약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대통령 후보들에게 생명안전 사회 건설을 촉구하기 전 묵념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난 5월2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생명존중, 안전사회를 위한 제21대 대선 공약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대통령 후보들에게 생명안전 사회 건설을 촉구하기 전 묵념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모든 눈물에는 온도가 있으니





나의 인생 2막을 정리하면서 자랑할 것은 없다. 이 연재를 충실하게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이 묻고는 한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했어요?” 경이롭다는 그 표정 앞에 당황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많은 일들은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많은 일들은 수많은 활동가들과 뜻을 이해해 주고, 자원봉사도 하고, 후원금도 내어 주고, 기어이 현장에 나와 자리를 지켜준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준 가족들, 단체의 활동가들, 나를 믿어준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나는 오늘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잘나서 이룬 것이란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잘한 일이 있다면? 눈물 흘리는 이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려 했고, 그 눈물의 온기를 기억하려고 애썼던 일일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가 흘리는 눈물에는 온도가 있기 마련이다(앗, 귀신들이 들으면 서운할 것 같지만). “모든 눈물에는 온도가 있음을 잊지 말자.” 그래야 사람으로 살 수 있으니까.



이제 마쳐야 할 때다. 못난 글, 힘든 글을 놓치지 않고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37년 전 저세상으로 서둘러 떠난 동생에게 묻는다. “래전아, 이 형이 잘하고 있는 거냐?” 동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끝>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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