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전-111][오리저널-31]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땅은 푸르렀고, 물길은 유장했다. 러브조이는 수풀을 헤치며 이 곳에 도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페티그로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같았지만 이들은 이 곳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두 사람의 ‘이름 전쟁’이 시작됐다. 러브조이는 자신의 고향 보스턴의 이름을 새 도시에도 붙이고 싶었다. 미국의 지성과 상업이 자라난 그곳처럼, 이 서부의 개척지에도 그런 미래가 피어나길 바랐다.
[오리저널]
‘오리저널’ 시리즈는 몰랐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오는 감탄사 ‘오(oh)’와 지역·지방을을 뜻하는 ‘리저널(regional)’의 합성어로 전 세계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유래한 재미있는 오리지널(original)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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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개척의 중심에 선 포틀랜드
1843년 어느 봄날 미국 서부 오리건. 아직 지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땅 위에 두 명의 사내가 발을 디뎠다. 한 사람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온 아사 러브조이, 다른 한 사람은 메인주의 해안 도시 포틀랜드에서 온 프랜시스 페티그로브. 둘 다 미 대륙의 서부 개척에 희망을 걸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은 윌래밋 강과 컬럼비아 강이 만나는 지역으로 오늘날의 포틀랜드 시내 한복판이었다.1850년대 포틀랜드 |
땅은 푸르렀고, 물길은 유장했다. 러브조이는 수풀을 헤치며 이 곳에 도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페티그로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같았지만 이들은 이 곳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두 사람의 ‘이름 전쟁’이 시작됐다. 러브조이는 자신의 고향 보스턴의 이름을 새 도시에도 붙이고 싶었다. 미국의 지성과 상업이 자라난 그곳처럼, 이 서부의 개척지에도 그런 미래가 피어나길 바랐다.
반면 페티그로브는 자신의 뿌리, 포틀랜드라는 이름에 남다른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메인주의 바닷가 마을은 조용하고 끈질긴 개척정신으로 가득했고, 그는 그 기운을 이 서부에도 옮기고 싶었다.
동전던지기로 도시이름이 정해지다
결국 두 사람은 동전 하나로 도시 이름을 정하기로 했다. 포틀랜드 페니라 불리는 그 동전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숲 속의 공터 위로 높이 던져졌다.첫 번째, 페티그로브 승. 두 번째, 러브조이 승. 세 번째, 마지막 동전이 페티그로브의 손에 안기자, 그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렇게 이 곳의 이름은 페티그로브의 고향 이름으로 정해졌다.
이름 하나를 두고 동전을 던져 도시의 운명을 정한 사례는, 미국 도시사에서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민주주의와 합리주의가 어깨를 나란히 한 타협의 풍경. 어찌 보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미국스러운 결정이다.
코인플랍으로 결정된 포틀랜드 지명 |
참고로 동전 던지기로 정해진 유명한 브랜드가 있다. 바로 배스킨 라빈스. 어바인 라빈스와 버턴 배스킨. 가족관계인 이 둘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창업하며 새로이 이름을 정하려 했다. 누구의 이름이 먼저 올것인지 논의한 끝에 포틀랜드와 마찬가지로 동전던지기로 정하기로 했다. 즉 동전의 반대면이 나왔다면 배스킨 라빈스가 아닌 라빈스 배스킨이란 브랜드가 탄생했을 것이다.
목재와 항구로 성장한 물류도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서부 개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이름만 있을 뿐 공터 위에 도시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들이 심은 나무는 윌래밋 강을 따라 제재소를 세웠고, 사방에서 개척자들이 모여들었다. 포틀랜드는 곧 목재와 항구, 철도와 노동자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금광을 찾아 서부로 몰려들던 이들의 발길은 어느새 이 도시를 스쳐갔다. 목재가 강을 타고 내려왔고, 제재소의 톱소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이 도시는 그렇게 나무를 베고, 강을 건너고, 바다로 나아가는 자들의 중간 기착지가 되어갔다. 그렇게 포틀랜드는 서부 개척의 상징이자 물류의 중심지가 됐다.포틀랜드 도시 전경 |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포틀랜드 정신’이라 부른다.동부의 뿌리와 서부의 가능성, 고향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기대가 교차하는 곳. 그곳이 바로 포틀랜드다.
스포츠 서부확장의 주인공이 된 포틀랜드
그리고 시간이 흘러 스포츠 산업에서도 서부개척시대가 1970년대 열렸다. 동부 지역을 연고지로 한 팀을 중심으로 구성된 스포츠팀이 서부지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1970년, 미국 프로농구(NBA)는 대대적인 확장을 감행중이었다. 이미 동부와 중서부를 중심으로 강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서부 해안 쪽은 상대적으로 빈 공간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사이의 물류 중심지 포틀랜드 역시 스포츠 프랜차이즈가 없는 무주공산이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해리 젤리프(Harry Glickman). 그는 당시 포틀랜드 지역 스포츠 프로모터로 활동하며 대학농구, 하키 등 다양한 스포츠 이벤트를 기획하던 인물이었다. 젤리프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 창단 당시 포틀랜드 팀 |
“포틀랜드에도 프로 팀이 있어야 한다. 농구가 딱이야.”
그는 지역 비즈니스맨들과 손잡고, NBA 프랜차이즈 유치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총 350만 달러.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젤리프는 팀 유치를 위한 치밀한 제안서를 NBA에 제출했고, NBA는 마침내 1970년 2월 6일, 포틀랜드에 새로운 팀 창단을 허가한다.
두번째 이름전쟁의 승자
팀 이름을 정하라, 전 주민이 참여한 ‘이름 전쟁’.팀이 정해졌으니, 이제는 이름이 필요했다. 젤리프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포틀랜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공모전을 개최했다. 총 1만여 개의 이름이 접수되었고, 그중 최종 후보 2개가 마지막까지 경쟁하게 된다. 그 주인공은 바로 ‘Pioneers’(개척자들)와 ‘Trail Blazers’(길을 여는 사람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팀 로고 |
‘Pioneers’는 심플하면서도 상징성이 강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포틀랜드의 루이스앤클라크 대학(Lewis & Clark College) 농구팀이 이미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던 것. 법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결국 탈락하게 된다.그렇게 살아남은 이름이 바로 트레일 블레이저스다. 이 이름은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오리건 트레일(Oregon Trail)을 따라 험한 산악지대를 헤치며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개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trailblazer”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여는 사람, 선구자”를 뜻한다. NBA 신생팀에게 개척자 정신과 지역의 상징성을 담은 해당 이름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결국 172명의 시민이 같은 이름을 추천했고, 이들은 모두 기념 상품과 시즌권 할인 혜택을 받게 된다.
개척자 정신 담긴 농구팀의 탄생
이름이 정해지고, 젤리프는 곧바로 팀 컬러를 정한다. 붉은색과 검은색. 열정과 힘을 상징하면서도 포틀랜드의 도시 이미지와 어울리는 강렬한 조합이었다.로고 디자인은 더욱 상징적이었다. 좌우로 비틀린 다섯 개의 선이 서로 교차하면서 대칭을 이루는 형상인데, 이것은 농구 경기에서 양 팀의 플레이어 5명이 맞붙는 ‘역동적인 충돌과 균형’을 상징한다.
1970년 10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는 처음으로 정식 NBA 경기를 치른다. 비록 첫 시즌은 29승 53패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끝났지만, 오리건 주민들은 이 팀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 팀은 단순한 농구 팀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인 도전, 개척, 끈기를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포틀랜드 로고 변천사 |
포틀랜드는 미국 서부 개척의 마지막 전초기지였고, 오리건 트레일의 종착점이다.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가 이 지역을 탐험했고, 셋틀러(settlers)들은 험한 길을 뚫고 이곳에 정착했다. 트레일블레이저스는 단순히 멋진 이름이 아니라, 오리건과 포틀랜드가 가진 역사적 배경, 문화적 자부심을 고스란히 담은 이름이다.
7년만의 우승, 오리건의 정체성
포틀랜드는 창단 7년만에 우승을 차지하며 NBA를 놀라게 했다. 1974년 전체 1순위로 팀에 입단한 빌 월튼이 그 주인공이다. 머리가 길고 수염은 덥수룩했지만 코트에서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잭 램지 감독과 함께 한 빌 월튼은 1977년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덴버, LA 레이커스를 차례로 제압한 뒤 줄리어스 어빙이 버티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우승 당시 지역 언론사 1면 |
이는 포틀랜드의 유일한 우승이다. NBA가 점점 상업화되고 도시 간 팀 이동이 잦아지는 지금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는 여전히 한 도시와 운명을 함께하는 팀으로 남아 있다. 신생팀의 가련한 운명을 생각한다면 우직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미래도 밝을 것이다.
[흥부전]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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