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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너스의 뱀파이어, 획득된 ‘백인성’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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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씨너스’ 스틸컷. 배급사 제공

영화 ‘씨너스’ 스틸컷. 배급사 제공


뱀파이어가 돌아왔다. ‘씨너스: 죄인들’의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초자연적 요소를 빼도 이야기가 성립되는 공포물을 좋아한다. 초자연적 요소란 그것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라고 말했다. 쿠글러가 뱀파이어의 스펙터클을 더해 더욱 강렬하게 만들고자 한 그 ‘이야기’란 무엇이었을까?



배경은 1932년 미시시피 델타. 시카고 갱단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은 주크 조인트(juke joint, 술집 겸 식당)를 열어 큰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꿈을 품고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역시 술과 음식, 음악, 그리고 건장한 문지기. 쌍둥이는 하루 동안 고향 마을을 돌아다니며 술집 오프닝을 준비한다.



그리하여 블루스의 천재 새미, 식자재를 제공하는 상점 주인인 중국인 보 부부, 건장한 신체의 콘브레드, 블루스의 전설 델타 슬림 등이 한자리에 모이고, 드디어 화려한 오프닝 파티가 열린다. 흑인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블루스가 파티의 열기를 더해가면서 밤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모습을 드러낸다. 포크송을 부르며 다가오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다.



아일랜드인들은 오랜 세월 영국의 식민 지배에 시달리며 차별을 당했다. 그들이 ‘유럽의 흑인’이라 불렸다는 사실은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인종적 위계의 모순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면 제니퍼 켄트의 처절한 복수 스릴러 ‘나이팅게일’(2019)을 함께 보면 좋다. 1825년, 영국 식민지였던 오스트레일리아(호주) 태즈메이니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죄수로 끌려와 삶을 송두리째 짓밟힌 아일랜드 여성 클레어와 영국인에게 모든 걸 빼앗긴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남성 빌리의 동행을 따라간다. ‘씨너스’의 스펙터클 아래 자리한 인종과 식민의 맥락을 잘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다시 ‘씨너스’로 돌아가보자. ‘유럽의 흑인’이었던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백인’이 된다. 미국 사회의 백인 우월주의에 동화되어 흑인들 위에 군림했고, 일부는 케이케이케이(KKK)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처럼 ‘백인성’이란 단순한 피부색이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획득되는 정체성이다. ‘씨너스’는 이런 역사를 뱀파이어가 된 아일랜드인을 통해 풀어낸다. 그렇다, 주크 조인트 앞에 찾아온 이들은 그냥 아일랜드인이 아니라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주크 조인트의 흑인들을 모두 뱀파이어로 흡수해 동화시키는 일이다. 흑인과 백인이라는 차이를 넘어 ‘우리’라는 동질적 집단을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없는 차이를 자의적으로 발명하고, 그렇게 발명된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버리는 이 억울한 세계를 뒤집어버리자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공격이 ‘사랑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화란 결국 흑인의 문화를 탈취하고 영혼을 빼앗아 무력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가 또 한편 있다. 21세기 블랙 웨이브 대표작인 조던 필의 ‘겟 아웃’(2017)이다. 이 작품에서 백인들은 흑인 신체의 강인함과 생명력을 탐하면서도 그들의 주체성이나 경험, 목소리를 철저히 지워버리려고 한다.



모두를 뱀파이어로 만들려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과 뱀파이어가 되지 않으려는 흑인들, 즉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사이에 한판 전쟁이 펼쳐진다. 그리고 아프리카계의 블루스와 아일랜드계의 포크가 스크린 위에서 자웅을 겨루게 된다. 이 영화의 장르는 호러가 아니라 뮤지컬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 시기 주크 조인트는 단순한 유흥업소가 아니었다. 노예해방 후 명목상 자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노예나 다름없는 착취와 차별을 견뎌내야 했고, 일상적으로 케이케이케이의 위협에 노출된 흑인들에게 이곳은 잠시나마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피난처였다.



영화 ‘씨너스’ 스틸컷. 배급사 제공

영화 ‘씨너스’ 스틸컷. 배급사 제공


‘주크’(juke)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크박스’의 그 주크다. 말하자면 이 공간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음악이라는 의미다. 이 단어는 아프리카어로 “사악하다”는 의미를 가진 ‘주가’(juga)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목사로서 흑인 교회를 이끌고 있는 새미의 아버지가 새미에게 “너의 사악한 음악이 못된 것들을 불러들일 것”이라고 경고하는 장면이 이렇게 연결된다.



그리고 영화는 질문한다. “사악하다”는 것은 누구의 언어인가? ‘씨너스’는 이 단어를 다시 해석하자고 제안한다. 노예제로 인해 삶을 짓밟힌 흑인을 위로했던 건 음악과 종교였다. 음악이 사악한 것일 수 있다면, 그건 그 노래가 노예들을 위로하고, 그들 자신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탱해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주크 조인트란 백인들에겐 지극히 사악한 공간, 두려운 공간이 되었다.



쿠글러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2022)에서 아프리카인과 아메리카 선주민의 이야기를 교차시켰다. ‘씨너스’에 이르러서는 그 위에 아일랜드계와 중국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덧붙인다. 지금의 미국을 있게 했으되, 주류 역사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았던 이들의 사연을 초자연적 스펙터클과 함께 되살려낸 셈이다.



그러나 쿠글러의 작품 세계가 그리는 것처럼 이는 그저 희생의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서 피해와 가해, 저항과 동화의 경계는 무참하게 섞여 들어가기 때문이다. ‘씨너스’는 이 역학을 포착하면서 할리우드 블랙 웨이브의 스펙트럼을 조금 더 확장시켰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손희정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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