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규 |
미북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북한은 지난해 12월 노동당 8기 11차 전원 회의 보고에서 미국을 가장 반동적인 국가라고 규정했다. 김정은은 올해 2월 국방성을 시찰하고 ‘세계 평화와 안정 파괴자’라며 미국을 비난했다. 북한 외무성 대외정책실장 명의로 수차례 미국을 비판하는 등 트럼프 대통령의 ‘러브콜’에 무관심으로 대응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친서를 보내려 했지만 뉴욕 상주 북한 외교관들이 수령을 거부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수령의 대외적 권위’를 수호하고 수령이 진행하는 ‘대외 혁명 활동’을 보좌하는 것은 북한 외교에서 최우선시하는 원칙. 북한 외교관들은 김정은이 다른 나라 국가 수반과 교환하는 서신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령·보고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김정은의 지시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 행정부가 뉴욕 상주 북한 대표부 관계자와 접촉했을 때 암시한 트럼프의 친서에 대해 북한 대표부는 본부에 즉시 보고했을 것이다. 외무성을 통해 김정은이 서신 수령 거부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미국과 협상할 의향이 전혀 없거나 준비돼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러·북 밀월 관계를 오래 유지하면서 러시아에서 정치·경제·군사적 이득을 최대로 챙기는 것이 급선무인 북한으로서는 미국과 하는 대화가 이득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 협상력을 높일 ‘소중한’ 기회를 날려보내는 꼴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중·북 냉각 국면을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도 북한이 미국에 눈길을 주지 않는 배경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북 간 협상 의제다. 그동안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양자, 4자, 6자 회담이 수십 차례 열렸고 그때마다 북한은 핵 포기 의사가 있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미국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역제안으로 회담을 깼다. 내가 2000년대 말 북한 외무성에서 근무할 때 김정일은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에게 전화로 ‘아직 6자 회담을 깰 때가 아니다. 더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당시 북한 외교관들은 6자 회담이 깨질 것으로 간주하면서 기대를 걸지 않았다. 2023년 9월 북한은 핵무력정책법을 제정하고 ‘핵보유국’임을 공식화했다. 더 이상 ‘시간 벌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당시 “핵보유국 외교관답게 당당하게 활동하라”는 지시가 수시로 내려왔다. 논의할 것이 비핵화밖에 없는 미북 협상에 북한이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은 올해 미국 대통령에 대해선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수차례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면서도 미국을 직접 자극할 수 있는 전략적 차원의 도발을 자제한 것도 주목할 일이다. 협상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한국을 배제하고 북한과 협상을 시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한 이후 북한이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직접 협상을 기획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난달 신형 구축함 진수식에서 김정은은 강한 어조로 한국을 비난·견제하면서 남북 관계에 선을 그었다.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미북 수교와 제재 해제를 목표로 삼는 북한은 한국이라는 장애 요소를 없애고 미북 직접 협상을 선호하겠지만, 미국이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김정은과 북한 외무성은 현재의 유리한 환경을 이용해 최대한 암묵적으로 압박하면서 미국의 의중을 타진하는 것 같다. 2019년 하노이 ‘노딜’ 책임을 지고 대미 협상팀이 실각·좌천당하는 것을 본 최선희로서는 미국 문제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지난달 이란 핵 시설 3곳을 벙커버스터로 타격했다. 핵 시설을 재건하려 하면 다시 때릴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이란 공격을 보면서 북한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유사한 사태가 적용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미국과 협상할 것인지, 아니면 핵 보유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면서 강경 자세를 유지할지, 예측은 조심스럽다. 내 생각은 후자에 무게가 실린다.
북한과 이란은 지정학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차이가 크다. 한반도에선 작은 불꽃도 국지전·전면전으로 발전하고 사상자가 수십만~수백만 명 날 수 있다. 북한을 겨냥한 군사작전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김정은도 인지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이란 공습을 기화로 핵 보유의 당위성을 강조함으로써 주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내부 결속을 다지며 국제사회의 핵 포기 요구를 거부할 명분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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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규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前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정치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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