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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딜레마[이준식의 한시 한 수]〈323〉

동아일보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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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이 닭을 묶어 장에 내다 팔려는데, 묶인 닭은 다급해서 소리 지르며 앙탈한다.

닭이 벌레 잡아먹는 걸 미워하는 식구들, 닭이 팔려 가면 삶겨져 죽는다는 건 모르는구나.

벌레든 닭이든 사람에게 뭐 그리 대수인가. 하인더러 닭을 풀어주라고 호통을 쳤다.

닭과 벌레의 득실을 따지자면 끝이 없겠지. 누각에 몸 기댄 채 차가운 강 응시한다.

(小奴縛鷄向市賣, 鷄被縛急相喧爭. 家中厭鷄食蟲蟻, 不知鷄賣還遭烹.

蟲鷄於人何厚薄, 我斥奴人解其縛. 鷄蟲得失無了時, 注目寒江倚山閣.)

―‘포박된 닭(박계행·縛鷄行)’ 두보(杜甫·712∼770)


벌레, 닭, 인간 3자 간의 모순이 혼란스럽다. 벌레를 잡아먹는 닭이 괘씸해서 닭을 내다 팔려고 하지만 팔려 간 닭은 또 인간에게 먹힐 게 뻔하다. 벌레도 닭도 그리 대수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에 시인은 닭을 풀어주라고는 했지만 불편한 심기는 해소되지 않는다. 이해득실을 따져 어느 한쪽 편을 들자니 마음 한구석이 영 께름칙하다. 유가의 측은지심, 불가의 자비심이나 불살생의 가르침으로도 이 난제가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여기에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개입돼 있음을 시인이 왜 모르겠는가. 다만 닭 소동의 해프닝을 겪으며 생존 본능에서 기인한 생명체 간의 모순을 새삼 실감하긴 했을 테다. 인간에게는 미물로 비칠지언정 벌레와 닭에게는 명운이 걸린 난제를 받아 든 시인, 딜레마에서 벗어나려 하릴없이 강을 응시하는 수밖에 달리 묘안이 없었나 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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