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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제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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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체계적이지 못해 사방으로 흩어진 밥풀처럼 난삽하기 그지없는 세상 공부다. 밥은 먹으면 부르고 술은 마시면 취한다. 이건 명백한 부작용이다. 수불석권(手不釋卷)하라는 선친의 가르침이 있어 옆구리에 책은 하나 끼고 다녔다. 문지방이 닳도록 호프집을 드나들던 시절, 어느 날 헌책방에서 만난 네 글자가 뒤통수를 때렸다. <꿈꿀 권리>. 가스통 바슐라르.

저 높은 곳의 달. 그곳에 누가 있어 지구의 후줄근한 나를 본다면, ‘넌 왜 아직도 거기에 거꾸로 매달려 있니?’ 하고 추궁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는 서로가 서로를 정중하게 받드는 상대성의 세계. 여기에 중심은 없다.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모두가 중심이라서 굳이 중심은 없다는 것. 철석같은 나를 배제한 절대 객관의 세계가 절실하게 궁금해서 그것에 대한 생각을 이리저리 굴린다. 요즘 AI가 대세지만 이 또한 IT의 일환이다. 겸손하게 소문자로 옮기면 it, 그것이 아닌가. 이러니 이런 제목에 어찌 마음이 휘어지지 않겠는가. <그대가 그것이다>. 스리 싯다라메쉬와르 마하라지.

책 하나 세상에 내보낼 때 끝까지 고민하는 건 제목이다. 이젠 아득해진 결혼이나 첫돌도 반지가 있어 반짝거리는 것처럼 똑 떨어지는 제목이 책의 운명을 좌우한다. 이 짧은 글에서 언급되는 책들은 실은 나의 지력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목록이다. 그래도 얄팍하게 잔머리를 굴려 제목만으로 나를 진창에서 구해준 책들. 그리고 이런 고마운 제목도 빼놓을 수 없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최근 궁리출판의 명민한 젊은 편집자를 통해 한 사상가를 알게 됐다. 나의 안목이 문제였지, 이미 널리 읽히는 뜨거운 저자였다. 스핑크스의 통찰에 따르면 인간은 저녁이면 지팡이에 의지해서 세 발로 걷는 짐승이다. 지구는 시시각각 매우 빠른 속도로 팽팽 돌고 있다. 이제껏 나는 지구에 타지 못하고 그 바깥을 떠돌며 방황하는 중이었다. 이제 현명하게 허리를 굽혀 아래를 향해, 지팡이를 브레이크 삼아 마구 내달린 삶의 속도를 달래며, 지구의 아늑한 좌석에 탑승하는 것, 내 무덤 속으로! 이런 생각에 힌트를 준 제목은 이것이다.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브뤼노 라투르.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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