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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4·3 토벌대 보조원과 희생자의 딸…한국전쟁 학살 조사 “폭싹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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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퇴계로 골목길에 서서 포즈를 취한 김애자 진실화해위 조사관. 고경태 기자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퇴계로 골목길에 서서 포즈를 취한 김애자 진실화해위 조사관. 고경태 기자


남자는 죽창을 들고 토벌대(경찰)를 따라다녔다. 토벌대는 해안가에서 5km 이상 산 쪽으로 올라간 중산간 마을을 이 잡듯 뒤지며 민가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였다. 중산간 마을에 살던 여자는 초토화 작전을 벌인 토벌대에 의해 남편을 잃었다. 그랬던 남자와 여자가 재혼으로 만나 가정을 이뤘다. 남자는 자식들에게 “폭도를 토벌하러 다녔다”며 허벅지에 생긴 흉터를 훈장처럼 보여줬다. 그 말을 듣는 엄마의 심정을, 10남매 중 막내딸은 헤아릴 수 없었다. 딸이 기자가 되어 4·3사건을 취재하러 다니게 된 것은 어떤 운명이었을까. 엄마는 그즈음 감춰뒀던 사연을 털어놓았다.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기자로, 1기에 이어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4·3사건과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사건을 조사해온 김애자(60) 조사관은 20세기에 이은 21세기 대한민국 과거청산의 현장을 지킨 산 증인이다. 조사관 중 최연장자로 뒤늦게 탄생한 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아 ‘마지막 봉사’를 했던 그가, 6월30일 정년퇴임과 함께 진실화해위를 떠났다. 송상교 사무처장과 28명의 직원이 2기 위원회 존속일인 11월26일까지 김애자 조사관을 더 근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별정직 공무원의 경우 기관장 재량으로 임기연장을 할 수 있는 특례조항이 있다.

제민일보 기자 시절이던 1997년 4·3 취재팀원들과 함께. 왼쪽은 4.3평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양조훈 당시 4·3 취재팀장, 오른쪽은 현 4.3평화재단 이사장인 김종민 기자. 김애자 제공

제민일보 기자 시절이던 1997년 4·3 취재팀원들과 함께. 왼쪽은 4.3평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양조훈 당시 4·3 취재팀장, 오른쪽은 현 4.3평화재단 이사장인 김종민 기자. 김애자 제공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가 고향인 김애자 조사관의 가족사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청년 시절 경찰 보조단체인 민보단(民保團)의 일원으로 전남편을 죽이는 행위에 가담했을 수도 있는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막내인 김애자 조사관을 낳기 직전까지 상군 해녀였다. 상군 해녀란 가장 깊은 바다에서도 물질하는 일급 해녀를 일컫는 말이다. 두 번의 결혼에서 아홉 명의 자식을 낳은 어머니는 출산 다음 날에도 밭으로, 바다로 묵묵히 일하러 나가야만 했다. “그때로 돌아가면 콱 죽어버리겠다”고 생전에 습관처럼 말하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은 황폐하고 참혹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하나 없는 김애자 조사관의 삶도 신산했다. 등록금 낼 형편이 못돼 장학금으로 실업고등학교를 갔고, 10남매 중 아무도 안 간 대학을 전액 장학금으로 뚫었다. 하지만 자취방 구할 돈이 없어 입학하자마자 휴학을 했다. 공채로 농협 은행원에 선발돼 1년간 방세부터 벌었다. 끝이 아니었다. 2010년 12월 1기 진실화해위 활동이 종료되며 생활 전선에 비상등이 켜졌을 때는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 요양병원에서 9년간 일했다. 2020년 2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하자 다시 조사관 생활을 이어갔고, 오늘에 이르렀다.

김애자 조사관은 진실화해위에서 나주·고창·영광·화순·인천 지역의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사건 조사를 담당했다. 1기와 2기 각각 700여명과 288명의 희생자에 대한 진실규명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중에는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도 포함돼 있다. 그 이전에는 1990~1997년 제주도 지역신문인 제민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며 4·3취재반으로 활동했다. 2000~2006년엔 제주4·3사건진상규명위원회 조사요원으로 일했다.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김애자 조사관을 만났다. 퇴임하는 소회를 넘어, 평탄하지 않았던 진실화해위의 긴 역사를 들었다. 국가폭력 조사를 위해 탄생한 이 국가기구가 제대로 활동해왔는지, 새롭게 태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특별법을 통해 과거 진실규명에 나서게 하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에 관해서도 대화를 나눴다. 김 조사관의 기구한 가족사도 그 현대사의 일부일 것이다. 이에 관해 그는 “(우리 집은) 제주도에선 특별한 사연 축에 들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 4월28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앞에서 열린 ‘역사왜곡 진화위원장 박선영 퇴진촉구 기자회견’을 찾은 김애자(오른쪽)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진실화해위지부 지부장이 노조원들이 5·18단체에 보내는 사과문을 읽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난 4월28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앞에서 열린 ‘역사왜곡 진화위원장 박선영 퇴진촉구 기자회견’을 찾은 김애자(오른쪽)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진실화해위지부 지부장이 노조원들이 5·18단체에 보내는 사과문을 읽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1기(2005~2010)와 2기 진실화해위(2020~2025)를 모두 경험했는데, 두 시기를 모두 종합해 정리해본다면.

“1기 진실화해위 때는 조사관으로서 자부심이 컸다. 50여 년 동안 묻힌 사건을 규명하여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들의 한을 풀어준다는 보람이 있었고, 그에 걸맞은 성과도 냈다고 생각한다. 신청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비슷한 사건이 숱하게 드러났다. 신청된 사건보다 미신청 희생자의 숫자가 더 많을 정도였다.

2기 진실화해위는 신청된 사건만 조사한다는 ‘신청주의’의 굴레에 갇혀 개별희생자의 사망 경위를 밝히는 데 급급했다. 전체적인 사건의 경위를 밝히기보다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할 때 필요한 근거자료를 작성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2기 조사 때는 시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 사망 경위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진술을 듣기 어려웠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유족이 많아지면서 사망 날짜를 특정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1기 위원회가 종료될 무렵 ‘파편화된 조사’라는 비판이 많았는데, 2기 위원회 조사는 희생자 여부를 판단하는 데 그쳤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제 3기 위원회는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할 수 있는 마지막 조사 기회가 될 것이다. 신청된 사건 외에도 직권조사로 의미 있는 조사를 많이 했으면 한다.”

― 조사 중지된 한국전쟁기 사건도 많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75년이란 시간이 흐르다 보니 사건을 기억하고 말해줄 수 있는 생존자가 많지 않다. 기존의 마을이 사라지거나 도시화 되었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지낸 시간이 많아 희생자의 사망 경위를 기억하는 참고인을 찾는 일이 어려웠다. 신청인부터가 아들 세대에서 손자·증손자·조카 등 사건을 잘 알지 못하는 세대로 바뀌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 사망 날짜를 모르는 유족이 많아지면서 육하원칙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 즉 사망일자조차 특정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사건의 결정 여부를 쥐고 있는 이옥남 상임위원(현재 임기 만료)과 국정원 출신의 황인수 조사1국장은 제적등본에 쓰여 있는 사망 일자가 다른 경우 인정해주지 않았다. 다행히 족보에 제대로 기재돼 있거나 학적부, 국정원의 ‘6·25 처형자 명부’ 등의 공문서에서 확인돼 어렵게 규명된 사건도 있지만, 많은 사건이 사망 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불능 또는 조사중지 결정됐다.

나는 전남 화순군 지역의 사건을 조사했는데 조사 중지된 사건 12건 중 9건이 목격자의 진술은 있었지만, 제적등본의 사망 일자가 잘못됐고 이를 반증할 다른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결국 조사중지 됐다.”

2기 진실화해위에서 극우 3인방 체제를 이뤘던 김광동 전 위원장, 이옥남 전 상임위원, 황인수 조사1국장(왼쪽부터)

2기 진실화해위에서 극우 3인방 체제를 이뤘던 김광동 전 위원장, 이옥남 전 상임위원, 황인수 조사1국장(왼쪽부터)


― 2기 조사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사건은?

“화순군 백아면 수리에 거주하던 일가족 4명이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을 피해 백아산 자락에서 토굴을 파고 생활하다가 군인들에게 발각돼 총살된 사건이다. 50대 부부와 20대 며느리, 3살 손자가 희생됐는데, 신청인은 희생자의 외손녀였다. 신청인의 어머니와 이모가 부근에 숨어서 현장을 목격했다. 이웃 주민도 목격한 사실을 증언해줬다. 그런데도 이들의 사망기록이 모두 다르고 족보나 학적부 등의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살아남은 딸은 친정부모의 사망 신고도 못 하고 살다가 2013년에야 사망신고를 하고 사건 신청을 준비하다 사망했다. 어머니에게서 사건을 전해 들은 신청인은 사건 경위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사건 판단은 조사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결정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그때 사망하였다는 증빙할 기록이 없으면 안 됐다. 이옥남 상임위원은 자신이 납득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조사가 끝난 보고서를 소위에 상정하지 않고 보류시켰다.”

― 1기 때라면 인정될 사건도, 2기에서는 인정되지 못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1기 때인 2008년에 조사한 ‘나주 다도면 민간인 희생 사건’을 떠올려본다. 그때는 조사관에게 승용차도 내주지 않을 때라, 동료 조사관과 함께 캐리어(여행용 가방)를 끌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갔다. 다도면 사무소에 가니, 인근에 숙박시설이 하나도 없어 어느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을 빌려 할머니가 해주는 밥 먹으며 4박5일간 조사했다. 유족들이 희생자들 이름만 적어놓았는데, 계곡과 산등성이 풀숲을 헤치면서 사건 현장을 정말 샅샅이 조사해 르포처럼 썼다. 기록이 하나도 없었으나 현장 목격을 한 사람들의 진술이 너무나 디테일해 진실규명이 됐다. 위로부터 잘했다는 칭찬까지 덤으로 받았는데, 지금 같으면 기록이 없다고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진실화해위에서의 보람은 진실규명 결정되고 신청인들 전화와 편지 받을 때다. 그들도 울고 나도 운다. 그들의 한을 풀어줬다 생각할 때 가장 큰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2기에서 그런 기쁨이 많이 줄어들었다.”

2008년 5월 9일 1기 진실화해위 집단희생조사국 조사관들이 서울 서대문구 안산으로 워크숍 갔을 때의 사진. 가운데 빨간 모자 쓴 이가 김애자 조사관. 그 뒤가 당시 상임위원이었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김상숙 제공

2008년 5월 9일 1기 진실화해위 집단희생조사국 조사관들이 서울 서대문구 안산으로 워크숍 갔을 때의 사진. 가운데 빨간 모자 쓴 이가 김애자 조사관. 그 뒤가 당시 상임위원이었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김상숙 제공


― 2기 진실화해위에서 느낀 문제점은?

“세 가지를 이야기해보겠다. 첫째는 확정판결 사건에 대한 판단 문제다. 과거사정리법(진실화해위 기본법) 제2조에는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제외한다’고 돼 있지만, 단서조항으로 ‘재심 사유에 해당하여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2기 위원회는 군법회의 등에서 사형을 당한 경우 법적 절차에 따른 확정판결 사건이므로 각하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1기 위원회에서는 군법회의 사건의 희생자도 회의의 불법성, 영장 없는 불법 연행, 불법 감금 등을 근거로 진실규명이 이뤄졌고, 이들은 재심을 청구해 무죄선고도 받았다.

또 하나는 1기 위원회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미신청 희생자 문제다. 이들 유족 중 일부가 진실화해위 결정을 근거로 민사소송을 진행했지만, 대부분 ‘근거 부족’을 이유로 패소했다. 이들 유족이 2기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지만, 위원회에서는 이미 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이기 때문에 조사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며 결정을 미루다 대부분의 사건이 조사 중지됐다. 유족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다.

마지막으로 서울대병원 집단학살 사건이다. 1950년 6월28~29일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된 직후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던 국군 부상병과 민간인 330여 명이 북한군 등에게 학살됐다는 사건이다. 이 사건의 조사는 미진하다. 그런데도 이 사건이 진실규명된 이유는 적대세력 사건인 데다 박선영 위원장 체제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330명이 학살되었다고 결정했는데 누가 희생되었는지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밝히지 못했다. 국군 부상병 등 330여 명이 희생된 것이 사실이라면 75년 동안 국가보훈부는 무엇을 하였는지 묻고 싶다. 국가는 진실화해위가 밝히지 못한 서울대병원 전사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밝혀줘야 할 의무가 있다.”

2001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위원회 조사요원으로 일하던 시절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에 조사하러 갔을 때의 모습. ‘큰넓궤’는 ‘크고 넓은 동굴’이라는 뜻인데, 들어가는 입구는 낮고 좁았다. 4·3 때 주민들이 숨어살던 곳이다. 김애자 제공

2001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위원회 조사요원으로 일하던 시절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에 조사하러 갔을 때의 모습. ‘큰넓궤’는 ‘크고 넓은 동굴’이라는 뜻인데, 들어가는 입구는 낮고 좁았다. 4·3 때 주민들이 숨어살던 곳이다. 김애자 제공


― 2기 진실화해위는 피해자에게 부역자 낙인을 찍는 ‘부역자 심사’ 문제로 시끄러웠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때는 2022년 12월 김광동 위원장이, 2023년 4월 이옥남 상임위원이, 9월에 국정원 출신 황인수 조사1국장이 임명된 이후다. 이들은 조사관들을 신청인의 주장에 편승해 사건을 조작·왜곡할 수 있는 사람들로 몰아갔다. 조사결과보고서와 진술조서를 일일이 대조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으면 조사에서 배제하겠다는 분위기였고, 실제 조사관 몇몇이 조사에서 배제됐다. 보통 30여 쪽의 조서 내용을 1~2쪽의 조사결과보고서에 그대로 다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요약과정에서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일인데도 조사관이 마음대로 조작 또는 각색한다고 의심했다.

2023년 종합감사는 그야말로 조사관 때려잡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검찰과 경찰에 감사인력 파견을 요청해 탈탈 털었다. 2주에 걸친 대대적인 감사 결과 일부 조사관의 비위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지만, 정말 사소한 일로 수십 명의 직원이 주의를 받았다. 예를 들면 주말 출장을 내고 결재했다는 이유, 정보공개업무에서 50원 미만을 절삭하지 않았다는 이유 같은 것 등이다. 이 감사 이후 여러 명의 조사관이 사표를 냈다. 결과적으로는 핵심 역할을 하던 조사관 몇몇이 그만뒀고, 남은 조사관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분위기는 위축됐다.”

― 군경에 의한 사건보다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에 주력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진실화해위 노조가 여러 차례 한국전쟁기 군경사건과 적대사건(인민군이나 지방좌익에 의한 사건)을 대하는 3인방(김광동 위원장, 이옥남 상임위원, 황인수 조사1국장)의 이중잣대를 비판한 적이 있다. 나는 화순군 지역에서 발생한 군경사건과 적대사건을 같이 조사했는데, 적대사건은 보고서를 작성한 후 보류된 적이 없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적대사건에 대해 지금껏 국가보상을 한 사례가 없어, 신청인 입장에서 보면 보상이 불투명한데도 적대세력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거짓 신청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신청인의 주장을 사실 그대로 인정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군경사건 피해자는 부역혐의자로, 적대사건 피해자는 인민군이나 좌익에 저항한 애국자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었다고 본다. 이는 김광동 위원장의 발언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2기 위원회 초기부터 군경에 의한 희생자 한 명당 1억3천만원의 국고가 나간다며 철저히 조사하라 지시했다.”

27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는 김애자 진실화해위 조사관. 고경태 기자

27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인터뷰하는 김애자 진실화해위 조사관. 고경태 기자


― 4·3사건과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은 연결됐다. 두 사건을 모두 조사했던 조사관으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4·3사건-여순사건-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사건은 시기와 장소만 다를 뿐 같은 모습으로 이어져 있다. 4·3사건이 일어난 뒤 제주로 출동 명령을 받은 14연대가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반기를 든 것이 10.19 여수·순천사건의 시발점이다. 1948~1949년 제주와 여수 등지에서 발생한 학살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대로 전국 곳곳에서 재현됐다.

1기 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시기 화순군·나주시·영광군·고창군에서 발생한 사건을 조사했는데 4·3사건의 유형과 너무나 똑같다는데 놀랐다. 군경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지역에 대한 수복작전을 벌이면서 해당 지역의 주민을 부역자로 적대시하면서 눈에 띄는 대로 총격부터 가하고 주민들의 집을 불태웠다. 군경 총격을 피해 산간지역으로 피난 간 주민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또 좌익들은 밤이면 산에서 내려와 군경가족이나 우익 측 주민을 보복 학살했다. 이런 악순환이 몇 년 동안 되풀이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4·3사건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지휘관을 추켜세워 표창하는 대신 과잉진압의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상식적인 대통령이었다면 한국전쟁 시기에 전국의 산하에서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군인들이 보도연맹원을 학살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군인들이 보도연맹원을 학살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 학살현장에서 군경에 살해당하기 직전 한 민간인이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50년 7월 대전 산내면 골령골 학살현장에서 군경에 살해당하기 직전 한 민간인이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기자로, 조사관으로 국가폭력 사건을 파헤치는데 평생을 보낸 셈인데,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폭력과 국가범죄는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보나.

“4.3사건이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사건 모두 국가공권력에 의한 국가폭력이자 국가범죄다. 원인은 권력자의 잘못된 지시, 이념이 다르면 국민이나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바로 6개월 전 12·3 내란에서도 이를 경험했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은 모두 종북좌파이고 척결대상이라고 여기는 권력자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이 땅에 다시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발생할 뻔했다. 장갑차와 총부리에 맞선 용감한 시민들,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은 군인들의 현명한 처신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다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을 깊이 새기고 민주화를 지키려는 국민이 있는 한 4·3사건이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사건 같은 국가폭력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전쟁 중 사건을 조사한 경험으로 볼 때, ‘인간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사건 조사를 하면서 가해자들이 왜 그렇게까지 잔인했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당시 대부분의 장병이 정규 교육이나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돼 전투경험이 없는 데다 ‘적의 수중에 있는 지역의 사람은 모두 적’이거나 그들과 부화뇌동하는 한통속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공포심,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분위기, 거기에다 내 가족이 적대세력에게 학살된 경우의 복수심 등이 겹쳐 무고한 희생이 더 커졌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런데도 민간인 희생을 줄이려고 애썼던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에 대한 사례를 들을 때는 인간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0일 오후 진실화해위 제111차 전체위원회가 시작되기 직전 박선영 위원장이 송상교 사무처장(왼쪽) 앞에서 손가락을 가리키며 이석을 요구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허상수 위원. 진실화해위 제공

10일 오후 진실화해위 제111차 전체위원회가 시작되기 직전 박선영 위원장이 송상교 사무처장(왼쪽) 앞에서 손가락을 가리키며 이석을 요구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허상수 위원. 진실화해위 제공


― 박선영 위원장은 2기 조사기간 연장을 말한다.

“국회에선 박선영 체제에선 조사기간 연장이 의미가 없다며 3기 위원회 발족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간단하다. 지금이라도 박 위원장이 사퇴하면 진실화해위 법을 개정해서 조사기간을 연장하고 새로 추가 신청을 받아 조사를 이어갈 수 있다.

박 위원장이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피해자와 유족, 직원들을 괴롭게 하고 국가 예산도 축내고 있다. 박 위원장은 지난 3월5일 100차 위원회 기념 및 5월 조사기간 만료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조사기간 연장이 안 될 경우 수천 건이 조사중지 되고 수많은 신청인들이 피눈물을 흘린다며 조사기간을 연장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 말이 진심이라면 물러나면 된다. 2천여 건의 조사 중지된 사건에 대해 곧바로 조사를 시작할 수 있고, 수만 건의 신청을 다시 받을 수 있다. 파견공무원을 제외한 1백여 명의 직원들은 해직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라를 걱정하는 보수라면,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어도 지금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 올해 1월 진실화해위에서 처음 노조가 생겼다. 초대 지부장으로 5개월간 일한 소회는?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노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올해 1월은 꾹꾹 참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찍소리라도 한번 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지부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노조 때문에 징계나 불이익을 받더라도 젊은 직원들보다는 정년을 앞둔 내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진짜 어른 노릇 한번은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노동조합의 힘은 연대에서 나온다. 지부-중앙행정기관본부-전국공무원노조로 이어지는 연대의 힘은 새내기 노조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노조 활동이 부각되면서 게시판 댓글에 주저하던 직원들도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직원, 중간 간부들, 민주당 추천 위원 등 안에서의 지지, 유족단체·신청인·시민단체, 언론 등 밖에서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 위원회 내부에서 조사관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걸 또 외부로 알리기도 했다. 앞으로 3기 위원회 출범의 동력을 만들어냈다는 의미도 있다. 지금도 노조 활동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직원들이 많다. 앞장서지는 못해도 노조집행부들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직원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3기 위원회에는 조합원의 복지에도 신경 쓰는 정말 노조다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면 한다.”

지난달 11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집회를 열어 박선영 위원장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회원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지난달 11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집회를 열어 박선영 위원장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회원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2기 진실화해위가 11월26일 끝나면서, 3기가 언제 출범할지 관심이 높다. 3기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 결정된 한국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보상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군경에 의한 희생자인 경우 유족들이 개별소송을 진행하고 있지만, 고령의 유족들은 절차를 모르고, 시간과 비용 문제로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진실규명 결정서를 받고 전화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국가를 상대로 변호사를 선임하여 소송해야 한다면 ‘산 넘어 산이네’ 하고 난감해한다. 제주 4·3사건처럼 일괄 배상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1기 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소멸시효 기간을 넘겨버린 희생자에 대한 구제도 필요하다.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인 경우 가해 주체가 북한군이나 지방좌익 등의 적대세력이기 때문에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무의미하다. 2기 위원회는 국회에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에 대한 피해구제 입법을 권고하였다. 가해주체가 적대세력이라 해도, 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지닌 국가가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 더욱이 정부가 위원회를 설립하여 조사를 진행하고 희생자로 결정하였다면 이에 따른 합당한 후속조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속한 3기 출범이 필요하다. 지금 용혜인 의원이 발의한 과거사정리법 개정안에는 3기 위원회를 12월 1일에 출범하자고 제시돼 있다. 진실화해위가 입수한 기록물이 많은데, 올해 안에 이뤄져야 기록물 등을 국가기록원에 이관했다 다시 빌려오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이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의힘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과거사 피해자들의 정치 성향은 다양하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국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고, 사과하고 책임지는 것은 민주국가의 기본이다. 2기 위원회도 당시 미래통합당 김무성 대표가 형제복지원 문제 해결에 대승적으로 합의를 해줘서 순조롭게 출범할 수 있었다. 3기 위원회 출범에도 협조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그리고 3기에는 최소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인식을 가진 인사를 위원으로 추천해주었으면 한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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