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동 주민자치회가 경양초등학교 학생들과 제작한 ‘살고 싶은 마을 지도’. 운암3동 주민자치회는 경양초 주변 도로의 일방통행을 관계 기관에 제안할 예정이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3동 행정복지센터 2층 주민자치회 사무실 벽에는 경양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마을 지도가 걸려 있었다. 학생들은 학교를 둘러싼 도로를 따라 공원과 아파트, 편의점, 아이스크림 가게를 그려 넣었다. 그런데 모든 도로의 제한속도가 시속 30㎞다. 도화지 크기 그림에는 제한속도를 알리는 표지판 14개와 신호등 5개가 등장한다. 도로는 일방통행만 할 수 있다.
그림을 보여준 허승희(54) 운암3동 주민자치회 사무국장은 “아이들이 만들고 싶은 마을의 모습이자 운암3동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그림”이라며 “시범적으로 경양초 주변 도로를 일방통행으로 해보자고 경찰과 자치단체에 제안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운암3동에는 호남고속도로 서광주 나들목과 15개 아파트 단지, 7개 초·중·고·대학, 4개 중소형 병원이 있어 평소에도 교통이 혼잡하고 교통사고도 빈번하다. 지난해 일회용품 없는 축제를 기획했던 운암3동 주민자치회 위원들은 올해 마을 의제로 교통 문제를 설정하고 경양초와 함께 해결 방안을 찾고 있다.
허 사무국장은 “지방자치를 발전시키려면 주민자치를 활성화시켜야 하고 주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며 “지금의 주민자치회가 꾸려질 당시 처음에는 분위기가 어색했지만 자주 밥을 먹고 행사를 기획하다 보니 위원들이 마을 의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주민자치의 시작은 위원 간 친해지기” 운암3동 주민자치회가 허물없이 학교, 지자체 등과 협의할 수 있기까지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동안의 주민자치회는 주민 참여가 저조하거나 역량이 부족해 행정기관이 주도한다는 한계를 보였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20년 6월 발행한 ‘주민자치회 설치·운영 현황 및 향후 개선 과제’ 연구보고서를 보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계기로 김대중 정부는 정부 조직을 축소하며 1999년 각 동사무소를 주민자치센터로 개편했다. 문화·복지·편의 기능과 지역 공동체 형성을 돕기 위한 취지였다. 주민자치센터 운영에 관한 사항은 주민자치위원회를 구성해 심의·자문하도록 했다. 주민자치위원회는 2003년 전국으로 확산했다.
하지만 공무원인 읍·면·동장이 주민자치위원을 임명하고 주민자치위원회는 주민자치센터의 운영만 맡다 보니 지역 주민을 대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2013년 ‘지방자치 분권 및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주민자치회 시범지역을 운영했다. 운암3동도 그중 하나다.
허승희 광주 운암3동 주민자치회 사무국장이 경양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만든 마을 지도를 소개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
초창기 운암3동 주민자치회는 위원회 때와 크게 달라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치단체장의 의지와 동장이 누군지에 따라 주민자치사업은 흔들렸고 담당 공무원에게 의지했다.
변화가 생긴 건 주민자치회 구성 뒤 10년 가까이 지난 2022년이다. 민선 8기가 들어서며 주민자치사업에 힘을 실었다. 광주·전남녹색소비자연대 대표를 맡아 시민단체 활동을 했던 허 사무국장도 이때 참여했다.
주민자치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행정기관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했다. 행정기관은 지원하는 역할만 하고 자치위원들이 살림을 꾸리기 시작했다. 매년 사업계획서부터 직접 작성했고 위원들 사이에 밥을 자주 먹는 등 소통을 강화했다.
지난해 마을 공동체 교육에 이어 올해는 학생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3월부터 녹색 교통 캠페인에 나섰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자치위원들이 경양초 주변 도로 통행을 돕고 있다. 위원들이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네자 주민들의 인식도 달라졌다. 운암중 학생들은 스스럼없이 자치회 사무실에 들러 간식을 먹었고 자치회 활동을 돕는 학부모들도 생겼다. 학교 쪽과 현안 회의를 하려면 예전에는 공문을 보내야 했지만 지금은 학교장에게 전화하거나 길에서 마주쳤을 때 말로 요청하기도 한다.
여전히 한계점도 있다. 주민자치회에서 급여를 받는 상근 직원은 1명뿐이다. 해당 직원은 노래·서예교실 등 행정복지센터의 주민자치프로그램 운영을 맡다 보니 자치회의 실질적인 사무는 허 사무국장이 무임금으로 맡고 있다. 운암3동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다른 동은 대부분 자치회 회의록이나 연간 사업계획서 작성, 주민총회 안건을 담당 공무원이 대신 해주고 있다.
허 사무국장은 주민자치가 활성화하려면 마을에 거주하며 정해진 임금을 받는 실무 활동가부터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학부모 중에서도 마을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지만 생업을 포기하고 매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중간조직 문 닫은 대전은 공동체 위기 주민자치가 자리를 잡아가는 광주와 달리 대전은 동력을 잃었다. 풀뿌리 공동체의 핵심 중간지원조직인 대전광역시사회적자본지원센터가 문을 닫은 것이다. 이 센터 기획운영팀장이었던 조효경 대전공동체운동연합 상임대표는 대전 지역 풀뿌리 자치 기반이 무너졌다고 한탄했다.
2022년 들어 윤석열 정부는 민간단체 국가보조금 감사를 진행하며 시민단체를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했고 ‘시민사회위원회’를 폐지하며 정부와 시민사회를 단절시켰다. 국민의힘 소속 이장우 대전시장은 동조하며 2023년 12월 대전사회적자본지원센터를 폐쇄했다. 센터 예산의 70%를 인건비로 쓰고 사업비는 30%에 불과해 예산 낭비라는 것이다. 센터 직원들은 “인건비는 30.8%, 운영비는 9.2%, 사업비는 60%”라고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대전시는 공동체 지원 예산도 2022년 42억7천만원에서 2023년 24억1천만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였다. 시민 참여 예산은 2015년 30억원에서 2021년 200억원까지 규모를 키웠지만 2022년 100억원, 2023년부터는 50억원으로 줄었다. 주민 참여 예산 제안 건수는 2022년 2684건에서 지난해 131건으로 95%나 감소했다.
마을활동가 교육과 마을계획 수립 등을 지원했던 사회적자본지원센터가 폐쇄되고 관련 예산이 줄자 일부 동 주민자치회는 주민총회를 열지 못했고 일부 동은 자치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대전시는 자치구에서 자율적으로 주민 공동체를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각 구의 재정 여건에 따라 주민자치회 운영 예산이 크게 차이가 났다. 시민들이 ‘기본적인 자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대전 지역 84개 마을 공동체와 시민단체는 비상조직을 만들어 대응했지만 대전시는 지난 4월 ‘대전광역시 엔지오(NGO)지원센터 설치 및 운영 조례’, ‘대전광역시 사회적자본 확충 조례’, ‘대전광역시 시민사회 활성화와 공익활동 증진에 관한 조례’ 등을 일괄 폐지하는 내용의 폐지조례안을 입법예고하며 공동체 활동의 근거마저 없애려고 시도하고 있다.
조 상임대표는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엔지오센터, 시민사회지원센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중간지원조직은 단순히 사업을 집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자치 역량을 끌어내는 연결자 역할을 한다”며 “중간지원조직과 같은 제도적 뒷받침, 자치 교육을 통해 주민 역량을 키우고 주민자치회의 법적 지위 강화와 자율 예산 보장 등을 통해 진짜 자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내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지방자치 실현을 위한 현실적인 조처가 뒤따라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기훈 광주시민사회지원센터장은 “지금까지의 지방자치는 정부가 인사권과 예산을 쥐고 권한을 지역에 행사했다”며 “진정한 지방분권이 이뤄지려면 정부기관의 지역 배치와 함께 특정 정당의 독식을 막기 위해 지역 정당제를 도입하고 주민소환제, 주민참여예산제, 주민감사청구 등 기존 제도들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광주 북구 운암 1·2·3동, 동운동 주민들이 꾸린 동운마을 기후환경 협치모임 회원들이 기후 의제를 논의하고 있다. 운암3동 주민자치회 제공 |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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