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위화도 회군과 백의종군의 차이
선조에겐 명나라 원군이라는 이순신의 대안이 존재했다. 왕이 이순신을 언제든지 내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결국 이순신은 선조의 불합리한 ‘백의종군’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사진은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임진왜란 당시 전력에서 조선군을 크게 앞서는 왜군을 혼자 힘으로 막아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큰 공을 세웠던 이순신 장군을 국왕인 선조가 백의종군(白衣從軍)시킨 일은 한국인이라면 가장 통탄해 마지않는 역사적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개인적인 억울함과 배신감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억울한 백의종군을 하고 있는 사이 새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이 국왕 선조의 지시를 그대로 따라 진격하다 칠천량(漆川梁)해전에서 참패해 원균을 포함한 조선 수군의 대부분 장수와 병사가 몰살당하고 막강하던 조선 수군도 겨우 12척만 남게 되어 국가적 위기에 봉착한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해 능력이 부족한 원균이 선조의 어리석은 지시를 따르는 바람에 결국 조선 수군은 괴멸적인 피해를 당했고 이제 왜군은 조선 반도를 모두 정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생각하면 같이 떠오르는 것이 그로부터 200여년 전 고려 이성계 장군이 결심했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이다.
고려 국왕 우왕과 최고권력자 최영은 이성계 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정벌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원(元)나라가 쇠퇴해 자신의 본거지인 몽골로 후퇴하는 상황에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새로운 중국을 차지한 명(明)나라가 조선의 철령 이북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명나라가 지배하는 요동을 군사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명나라와의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명나라가 아무리 신생국이라 해도 강력한 몽골군을 몰아내고 중국을 이미 차지한 명나라를 공격하는 전쟁을 했을 때 고려 군대가 승리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을 것이다.
선조가 무리하게 조선 수군을 이끌고 부산 왜군 본진을 공격하라 했을 때의 이순신 장군 심정과 고려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 요동을 정벌하라는 우왕 명령을 받은 이성계 장군 심정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었을 테다.
하지만 이성계 장군과 이순신 장군 행동은 완전히 반대였다. 이순신 장군은 왕의 무리한 지시를 거절하다 체포되어 벌을 받고 백의종군하는 처량한 신세가 된 반면, 이성계 장군은 왕의 무리한 지시를 어느 정도 따르는 척하면서 압록강 위화도까지 갔지만 결국 반란을 의미하는 회군을 해서 수도인 개성으로 쳐들어갔다. 이후 결국 권력을 잡고 나중에 스스로 국왕이 되었다.
유교 사상 관점에서 보면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은 분명 반역이고 배신이다. 아무리 왕의 지시가 비합리적이더라도 반란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면 안 되는 것이다. 반면 비합리적인 지시를 따르지 않다 결국 처벌을 받은 이순신 장군 행동은 유교 사상의 모범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 옳았고 이성계 장군은 틀렸다고 할 수 있나? 이성계 장군은 부패하고 쇠퇴한 당시 고려의 정치 시스템을 개혁하면서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고 그 결과 백성의 삶은 크게 개선되었다. 반면 이순신 장군 행동은 개인적으로는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국왕 처벌을 순순히 받는 사이 조선 수군을 괴멸되어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졌다.
조선은 개국한 지 200년이 지나 당파 싸움이 시작되고 기득권 계층에 의해 백성의 삶이 피폐화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 침입에 대비하지 못한 조선 지배층을 획기적으로 개혁할 기회를 놓쳤던 것이 아닐까? 당시 조선 수군은 조선 병력에서 압도적인 세력이었을 터인데 이순신 장군이 역성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백의종군을 거부하고 계속 삼도수군통제사 지위를 고집했다면 과연 멀리 의주에 있는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체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라는 선조 명령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수군 통제권을 내놓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조선의 개혁 세력이 되어 조선 발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가능하다.
어째서 이순신 장군은 이성계 장군처럼 위화도 회군과 같은 혁명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을까?
경제학의 협상 게임(bargaining game)에서 중요한 요소가 바로 대안(alternative)의 존재다. 만일 당신이 협상 상대방에게 “나는 당신과 협상을 안 하더라도 다른 협상 대상자가 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협상에서 아주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때 바로 그 ‘다른 협상 대상자’가 대안이다.
당시 고려 왕이었던 우왕에게는 이성계 장군에 대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홍건적과 왜구 같은 외적 침입이 빈번하던 시기에 조선에서 그런 전투를 승리로 이끌 능력을 가진 장수는 이성계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영 장군이 있었지만 최영 장군은 벌써 70세를 넘긴 노인이었으니 이성계 장군의 대안이 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성계 장군이 없다면 요동 정벌은 고사하고 왜구의 침략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성계 장군 지위를 박탈해 백의종군시킬 수도 없었을 테다.
반면 선조에게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대안이 존재했다. 물론 조선 장군들 중 이순신을 대신해 왜군을 물리칠 장군은 없었지만, 명나라에서 보내준 명나라 원군(援軍)이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명나라 원군의 파병이 없어 오로지 이순신 장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명나라 원군이 파병이 되고 나서는 이순신 장군이 없어도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지키기 위해 왜군과 싸워줄 것이므로 선조로서는 자신의 지시를 자꾸 거부하는 이순신 장군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을 터다.
한국 역사에서 역성혁명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왕건 장군이 섬기던 왕인 궁예를 몰아낸 혁명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궁예가 관심법을 이용해 왕건의 마음을 읽고 그에게 역모가 있다고 추궁했다. 이 기록이 맞다면 궁예 역시 자신의 부하지만 능력이 출중하고 자기보다 더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왕건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예의 의심을 견디다 못한 왕건이 반역을 일으켜 궁예를 죽인 것처럼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세력이 커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왕건의 의도를 눈치챈 궁예가 관심법이라는 이름으로 한번 견제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마도 궁예는 모반 가능성이 있는 왕건을 제거하면 후백제 견훤과의 전쟁을 이끌 사령관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왕건에게 경고를 주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왕건 장군과 이성계 장군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선조도 능력이 뛰어나고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한 이순신 장군에게 궁예가 왕건에게 느꼈을 불안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마침 이순신 장군이 없더라도 명나라에서 파병 온 원군이 있으므로 이 대안을 믿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순신 장군을 벌해서 백의종군시킨 것은 아닐까.
왕건은 중국에서 송나라와 요나라가 다투던 시기에 등장했고 이성계는 중국에서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시작되던 시기의 인물이므로 궁예와 우왕에게는 대안이 없었던 반면 이순신은 아직 명나라 세력이 강하던 시기의 인물인 관계로 선조에게 이순신 외의 대안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순신 장군 운명은 다른 두 사람 운명과 달라지게 됐다.
자신의 위치가 독점적인 상황인지, 아니면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전략적으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6호 (2025.07.02~07.0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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