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엄지민
안녕하세요. 엄지민입니다. 현상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좇아, 팩트추적! 지금 시작합니다.
【인트로】
'가노라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들아.'
고즈넉한 법당 안 벽면에 새겨진 이름 모를 부상병들의 낙서.
▶엄지민
안녕하세요. 엄지민입니다. 현상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좇아, 팩트추적! 지금 시작합니다.
【인트로】
'가노라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들아.'
고즈넉한 법당 안 벽면에 새겨진 이름 모를 부상병들의 낙서.
세월의 무게에 글씨는 흐릿해졌지만….
처절했던 전쟁의 기억까지 잊히지는 않았습니다.
[현덕스님 / 통도사 주지 : 스님들께서 손수 나서서 환자들을 또 장병들을 다 돌보고….]
도심 한가운데에 녹아 있는 고아들의 아픔도….
[김병삼 / 영락보린원 원장 : 밀가루빵으로 (끼니를 채우며) 피난을 가고 그랬는데.]
평화로운 산야 뒤에 감춰진 그 날의 비극도….
[엄영현 / '적대 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유족 : (북한군한테) 끌려와서 14일 만에 여기서 학살된 거야.]
[최동임 /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유족 : 420명이 넘게 창고 안에서 갇혀서 총살당했으니…]
바뀌어버린 흔적 너머의 고통은 아직 멎지 않았습니다.
[최봉열 / 실향민(교동도 거주) : 꿈이 가시질 않아. 그냥 매일 꿈꾼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홍성복 / 남북이산가족 : 어머니가 거기(북한에) 남아 계시고, 동생 셋 그러니까 남동생 둘에, 여동생 한 명이 있는데….]
승자도 패자도 없이 상처만을 남긴 6‧25 전쟁.
끝나지 않은 75년간의 눈물의 기록을 다시 펼쳐봅니다.
【스튜디오】
▶엄지민
팩트체커 윤성훈 기자와 함께합니다.
윤 기자, 지난 시간에는 사투가 벌어진 전장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는데, 상흔이 깊게 팬 곳은 이들 격전지만은 아니죠?
▶윤성훈
맞습니다.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됐던 만큼 그 누구도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저마다의 애절한 사연이, 현재는 많이 변해버린 당시의 현장에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 VCR - 1 】
경남 양산 영축산 자락의 포근한 품에 안긴 대한민국 3대 사찰, 통도사.
천년 넘는 역사가 깃든 유서 깊은 고찰입니다.
지금은 불자들이 오가며 평온을 되찾는 이 공간이, 75년 전엔 전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다친 수많은 부상병을 치료한 '제31육군병원 분원'으로 쓰였던 겁니다.
[현덕스님 / 통도사 주지 : 용화전, 대광명전, 또 관음전, 지장전. 이런 여러 전각이 거기서 이제 치료하는 그 병원으로 사용됐고….]
스님들은 염불 대신 붕대를 들고, 피 흘리며 신음하는 병사들을 보살폈습니다.
[현덕스님 / 통도사 주지 : 고통스러운 생명을 구하라는 그런 메시지가 크니까…. 전쟁 당시에 힘든 상황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참혹했던 당시 모습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지만, 법당 한쪽엔 그때를 증언하는 병사들의 낙서가 남아 있습니다.
[정대스님 / 통도사 기획국장 : 정전이 웬 말 이렇게도 써놓으신 분도 계시고 저쪽으로 가시면 낙서가 지금 몇 군데 더 있어요. 4284년(단기) 이렇게 6월 10일 이런 식으로 도착….]
치열했던 전장을 떠올린 듯 탱크와 철모 그림부터, 가족과 연인으로 보이는 여러 이름, 그리고 애끓는 전우애까지….
희미해진 글씨 속엔 부상병들의 그리움과 애환이 담겨있습니다.
[김형태 / 통도사 성보박물관 학예팀장 : 1950년도에 6.25 사변이 발발해서 이제 국군 상이병, 다친 병사들 3천 명이 이 절에 들어왔고 2년 뒤인 1952년에 다 이 절에서 나갔다.]
말로만 전해지던 그때의 기억이 기록으로 뒷받침되면서, 통도사는 지난 2021년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됐습니다.
부산 금정산 기슭에 자리한 범어사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힘을 보탠 '호국 사찰'이었습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듬고….
[정여스님 / 범어사 방장 : 야전 병원 역할도 하고, 야전 지휘소 역할도 했고, 수많은 피난민의 안식처가 되고 고아들이 끊임없이 범어사로 밀려와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유해를 직접 화장해, 안장하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정여스님 / 범어사 방장 : 당시는 범어사가 유일한, 이렇게 군 장병을 돌보고 유해를 안치시키는 그런 장소가 되고….]
1956년 국군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임시 현충원' 역할을 했던 범어사.
역시 지난 2023년 '국가현충시설'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정여스님 / 범어사 방장 :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에 대해서 정말 마음속 깊이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일으켜야 하지 않나….]
【스튜디오】
▶엄지민
고요하고 아늑한 현재 절의 모습만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가늠조차 어려운데요.
그런데 이런 비극은 '전장 밖' 민간인들에게도 가혹하게 다가왔죠?
▶윤성훈
네, 6·25 전쟁 기간 사망과 부상, 납치 등을 당한 남한 지역 민간인은 99만 명이 넘습니다.
북한 지역 추정치까지 합하면 남북한 민간인의 인명 피해 규모는 249만여 명에 달하는데요.
특히,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 VCR - 2 】
쉴 새 없이 터진 포탄에 생지옥으로 변해버린 서울 용산 일대.
빽빽이 들어선 빌딩 틈에서 그날의 절규가 더는 들리지 않지만, 아픈 기억만큼은 오롯이 간직한 곳이 있습니다.
고 한경직 목사가 1939년 신의주에 세웠던 아동 보호 시설에 뿌리를 둔, 영락보린원.
[김병삼 / 영락보린원 원장 : 약자를 돕는 게 바로 우리가 그 신앙인들이 기독교인들이 해야 되는 그런 정신 그러니까 사명으로 알고 아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나.]
해방 뒤 서울에서 재건된 고아들의 안식처에도 전쟁의 참화가 덮쳤습니다.
북한군이 아이들을 끌고 간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돈 긴박했던 상황.
보린원 식구들은 보호하고 있던 아이들 60여 명을 데리고 피란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또다시 남쪽으로, 목숨을 걸었던 험난한 여정.
[김병삼 / 영락보린원 원장 : 아이들은 부두에 요 깔고 이불 덮어씌우고…. 멀리 배 한 척이 바다에 떠 있는 거예요. 우리도 좀 태워달라.]
겨우 제주도에 도착했지만, 머물 데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지붕만 있다면 어디든 의탁해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그렇게 견뎌낸 역경의 시간….
휴전 이후 서울로 돌아와선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까지, 고아 200여 명의 울타리가 됐습니다.
[김병삼 / 영락보린원 원장 : 당시 정부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민간들이 하나둘 모여서 이런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한 거고.]
북한군을 피해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던 1951년 부산.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마주한 현실은 더욱 암담했습니다.
그해 12월 천막 3동으로 '다비다 모자원'이 개원하는 등 홀로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윤성진 / 부산 영락교회 목사 : 남편하고 이별하고 어린 자녀들을 키우면서…. 일정 기간 어머님이 아이를 양육하면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엄청난 수요에 비해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고, 많은 여성은 힘겨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튜디오】
▶엄지민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의 이야기가 특히 안타까웠는데요. 규모가 얼마나 되나요?
▶윤성훈
정확한 수치를 집계하긴 어렵지만, 전쟁 직후 보호 시설에 머물고 있던 어린이는 4만 8천 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시설 밖 고아들까지 포함하면 10만 명에 달할 것이란 추산이 학계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정부는 전쟁고아 대책의 하나로 지난 1955년부터 1961년까지 4,100명을 해외로 입양 보내기도 했는데요.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았던 이 기간에 이뤄진 해외 입양은 기록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실정입니다.
▶엄지민
비무장 민간인이 북한군 등 적대 세력과 우리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픈 역사도 있죠?
▶윤성훈
네, 전쟁의 혼란과 이념 대립의 광풍 속에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스러져갔습니다.
【 VCR - 3 】
강원도 양구군 비봉산 중앙의 곧게 뻗은 골짜기, 곧은골.
새들의 지저귐만 들릴 뿐, 한없이 고요합니다.
그러나 75년 전 이곳은 주민들의 비명이 가득했던 참극의 현장이었습니다.
당시 12살 소년이었던 엄영현 씨.
아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끔찍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6‧25 전쟁 발발 전 38선 이북, 북한 땅이었던 양구군.
공무원이었던 엄 씨의 아버지는 개전 몇 달 뒤 국군이 입성하자 공산당과 절연하겠다는 자술서를 썼습니다.
[엄영현 / '적대 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유족 : 아군이 들어오니까 그 아군한테 붙들린 거예요. 붙들려서 자술서를 쓴 거예요. 공산주의가 싫고 자유 민주주의를 택했다고 하고….]
하지만 얼마 안 가 전세가 역전됐고, 이 서류는 비극의 단초가 됐습니다.
자술서를 발견한 북한군이 '반동분자'라며, 엄 씨의 아버지 등을 잔혹하게 살해한 겁니다.
[엄영현 / '적대 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유족 : (북한군한테) 끌려와서 14일 만에 여기서 학살된 거야. 총을 여기(가슴)에 한 발 맞고 다리에 한 발 맞고….]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눈 잘못은 일부 대한민국 군경도 저질렀습니다.
[엄효식 / 한국국방안보포럼 사무총장 : 애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하는 경우도 되게 많이 있고 포로들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그 포로를 획득한 상대국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매우 안타깝고요.]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국전쟁유족회 사무실.
우리 군과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 유족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한국전쟁유족회 관계자 : (6‧25 전쟁) 당시에 억울하게 희생되신 모든 영령을 위하여 일동 묵념]
서로를 위로하며 진실 규명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동임 /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유족 : (6‧25 전쟁 때) 420명 넘게 창고 안에 갇혀서 (아버지도) 총살당했으니, 피범벅이 된 곳에서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겨우 찾아서 주변 공동묘지에 매장하셨대요.]
단순히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 사건' 등 적법 절차 없이 자행된 '국가 폭력'.
이념도, 단체의 성격도 잘 알지 못한 애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았습니다.
뒤늦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 조사로 진실이 드러난 사건들이 있지만, 여전히 한을 풀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설사 진실 규명 결정을 받았더라도, 3년 안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이겨야 배상이 이뤄집니다.
이런 절차 자체를 몰랐던 고령의 희생자 유족 중에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날린 사람도 있습니다.
[곽연자 /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유족 : 시효라는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소송해도 이게 승소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나와 버렸어요. (아버지가) 1차 가해를 당했는데 자식이 또 2차 가해를 당하는 꼴이에요.]
진실화해위 결정 이후 후속 조치가 미흡하다는 지적 역시 끊이질 않습니다.
2기 진실화해위가 6‧25 전쟁 기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결정한 건 올해 5월 발표 기준 5,422건.
그러나 중앙정부 차원에서 사과가 이뤄진 사례는 아직 한 건도 없습니다.
[정명호 / 한국전쟁유족회장 : 정부가 국가 공권력으로 학살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사과는 분명히 따라야 하는데….]
【스튜디오】
▶엄지민
이분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제도와 정책 보완이 꼭 뒤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이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들은 또 있죠?
▶윤성훈
네,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의 눈물이 여전히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 VCR - 4 】
바다 건너 황해남도와 마주한 인천 강화군 북서쪽의 섬 교동도.
최단 거리는 불과 2.5km, 맑은 날이면 손에 잡힐 듯 북녘땅이 가깝습니다.
잠시 폭격을 피해 내려왔던 이들의 그리움은 그만큼 사무칩니다.
[최봉열 / 실향민(95세, 교동도 거주) :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미산이라는 데서 살다가, 6·25전쟁 때 천만 이산가족 틈에 일원으로 나왔습니다.]
[지용미 / 실향민 2세(교동도 거주) : 어릴 때부터 아빠가 항상 주소를 말씀해 주셔서 아빠 고향은 호동면 남당리다. 바닷길만 아니면 그냥 아빠랑 손 붙잡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되게 보면서 아쉽죠.]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절절한 마음은 교동도 곳곳에 스며있습니다.
황해도 연백시장을 떠올리며 실향민들이 함께 일궈낸 대룡시장.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제비가 북녘 소식을 전해주길 소망하며, 작은 새의 둥지마저 소중히 여긴 '제비마을'.
그리고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제단에는 75년 동안 켜켜이 쌓인 슬픔이 묻어 있습니다.
[김향희 / 교동도 주민 : (시아버지가 실향민이신데) 산에 가서 보면 집도 보이고 하니까, 여기가 우리 집이다 이렇게 보면서 여기 고향을 못 떠난 거예요.]
스무 살 청년을 아흔다섯 노인으로 만든 75년이란 세월.
살아생전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지….
흘러가는 시간과 기약 없는 기다림이 그저 야속할 따름입니다.
[최봉열 / 실향민(95세, 교동도 거주) : 꿈이 가시질 않아. 그냥 매일 꿈꾼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 꿈에 나타나. 옛날에 친구들하고 놀던 꿈, 갈 수도 없고 그냥 슬픔을 그대로 안고 사는 수밖에 없어서 오늘날까지 살고 있는 거지.]
【스튜디오】
▶엄지민
제비집마저 함부로 치우지 않는다니…. 실향민들의 절절한 심정이 느껴져 저도 참 마음이 아프네요.
▶윤성훈
그런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더해 이별의 상처마저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엄지민
이별의 상처요?
▶윤성훈
네, 북녘에 가족을 두고 온 남북이산가족의 애끓는 호소가 더욱 간절해지고 있습니다.
올해 3월 말 기준, 정부에 혈육을 찾아달라고 신청한 남북이산가족은 모두 13만 4천여 명인데요.
이 가운데 현재 살아계신 분은 3만 6천여 명에 불과합니다.
▶엄지민
경색된 남북 관계로 이산가족 상봉이 중단됐잖아요? 생존해 계신 분들의 초조한 마음이 더 커질 것 같아요.
▶윤성훈
맞습니다. 당장 만남이 어렵다면,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 VCR - 5 】
올해 84살인 홍성복 씨는 1950년 6월, 여느 또래처럼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북한군이 전쟁을 일으킨 직후에도 평소처럼 학교에 갔습니다.
[홍성복 / 남북이산가족 : 학교를 갔더니 벌써 빨간 완장을 찬 사람이 연단에 올라가더니 인민군으로 입대하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한시가 급해지자, 작은아버지와 고향인 황해도 연백군을 떠나 연평도로 향했습니다.
아버지가 미리 가 있던 곳에서 몇 개월만 피신했다가 돌아올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북에 남은 가족들과 기나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홍성복 / 남북이산가족 : 길어야 1~2개월 잠깐 몸만 피하면 된다. 결국은 증산도로 해서 연평도에 거주하다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 셋….
북녘의 혈육이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이산가족 찾기 신청은 주저했습니다.
행여 월남한 자신 때문에 핍박받지는 않을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커지는 그리움을 끝내 외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홍성복 / 남북이산가족 :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안 하다가 최근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 연세가 어머니는 벌써 1910년생이니까 백열 살이 넘으셨잖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 그래도 내가 뭔가 찾아야겠다 해서 그 DNA도 검사하고….]
퇴직 이후에는 고향을 회상하며 이북5도위에서 명예 연백군수를 맡은 홍성복 씨.
남북 관계가 개선돼 북쪽 가족들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홍성복 / 남북이산가족 : (그리워하시는 어머니를 뵐 수 있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저는 그래요, 불효자입니다. 우선 용서해 주십시오. 우선 그 말부터 드려야죠.]
정부는 매달 이산가족 신청을 받고는 있지만, 꽉 막힌 남북 관계 탓에 만남 성사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전문가들은 곧바로 상봉이 어렵다면, 서신과 영상 교환이라도 재개할 수 있도록 정부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김용현 /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현실적으로 대면 상봉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북측에 있는 가족들도 고령화가 이미 돼 있고 그들은 사망자가 더 많죠. 왜냐하면 보건의료 체계가 더 좋지 않으니까…. 그래서 화상 상봉이랄지 다른 여러 가지 방식들을 동원해서….]
【스튜디오】
▶엄지민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사는 이산가족들을 위한 대책도 필요하다고요?
▶윤성훈
통일부가 지난 2023년 진행한 조사 결과를 보면, 북미 지역에 거주하는 해외 이산가족의 90%가 북한 가족의 생존 여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민간교류 단체 등을 통해 생사를 확인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19.3%에 그쳤습니다.
가장 시급한 정책으로는 생사 확인과 고령층 우선 교류, 대면 상봉, 고향 방문 등을 꼽았습니다.
현재 '이산가족법'은 남북한에 사는 이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요.
사각지대에 있는 이산가족에 대한 지원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김용현 /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산가족, 실향민 문제는 빨리 해결돼야 한다.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이고.]
▶엄지민
75년이란 세월에 닳아 전쟁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상처를 여전히 안고 살아가는 분들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그분들의 아픔을 잊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윤 기자, 수고했습니다.
▶엄지민
오늘 팩트추적은 여기까집니다.
저희는 다음 주에도 현상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좇아, 시청자 여러분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겠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YTN <팩트추적> 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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