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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87] 장욱진의 나룻배

조선일보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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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나룻배, 1951년, 나무판에 유채, 14.5x30cm, 자료제공 (재)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 나룻배, 1951년, 나무판에 유채, 14.5x30cm, 자료제공 (재)장욱진미술문화재단.


나룻배에 황소 한 마리와 책가방을 등에 진 학생을 태웠다. 뒤이어 닭 한 마리를 품에 안은 아낙, 큰 짐을 머리에 인 여인, 자전거를 꼭 잡은 까까머리 아이가 섰다. 수면이 너무 맑고 고요해서 배가 가기는 하는 건지 의문이지만, 황소부터 사공까지 하나같이 무심히 서서 바라보는 방향이 제각각 다른 걸 보면, 배는 무탈히 흐르는 모양이다. 한국적인 풍광과 정서를 꾸밈없이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고 명징하게 그려낸 화가 장욱진(1918~1990)의 ‘나룻배’다.

황소나 자전거는 말할 것도 없고, 책가방과 닭, 그리고 보따리는 그 주인들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이들을 모두 태운 나룻배가 늘 그림처럼 한가롭고 평온하게 오가면 좋겠지만, 사실 장욱진이 이 그림을 그린 건 1951년, 한국전쟁 중이었다.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태어난 장욱진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다, 1936년 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조선일보사에서 개최한 전국 학생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기로 했다.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해방을 맞이했지만, 그 시절 장욱진의 그림은 어둡고 진중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색채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장욱진처럼 밝고 순수하며 그림 속 사람들이 어린아이처럼 무해하고 천진하게 된 건, 전쟁이 일어난 다음이었다.

‘나룻배’는 사실 그가 1939년 고향 선산지기의 어린 딸을 그린 나무판의 뒷면에 그려졌다. 화가가 이 소녀상을 유독 아껴 피란 중에도 끌어안고 다니다가, 어느 날 그 뒷면에 나룻배와 사람들을 그린 것. 만약 그가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안고 배를 탄다면, 그의 품에는 이 그림이 있었을지 모른다. 나룻배는 그렇게 그 옛날의 소녀를 싣고 상상 속의 평화를 조용히 건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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