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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는 박찬욱 감독 |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예술가들이 작품을 꾸준히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재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이야깃거리는 소진되기 일쑤다. 서양의 시인들은 재능이 말라갈 때 '뮤즈'를 애타게 찾았고, 동양의 시인들도 한 번 찾아왔다 떠나가고야 마는 시의 귀신, 시귀(詩鬼)를 원망하며 그가 다시 찾아오길 울면서 갈구했다.
적어도 박찬욱 감독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영화의 원천이 되는 수많은 책이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커다란 히트작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비롯해 '올드 보이'(2003), '박쥐'(2009), '아가씨'(2016), 그리고 올 추석 개봉 예정인 '어쩔 수가 없다'(2025)까지 상당수 작품이 원작 소설이나 만화를 각색한 영화다.
그는 2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석해 아직도 만들고 싶은 문학 작품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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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사진] |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첫 챕터만 읽어봤을 때도 너무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건 걸작이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는 아직은 막연한 희망 같은 것이라면서도 박경리의 '토지', 이문구의 '관촌수필', 신경숙의 '외딴 방'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특히 김훈의 '칼의 노래'를 그만의 방식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내비쳤다.
박 감독은 "김훈 선생의 문체를 (영화적으로) 흉내 내고 싶다. 엄격하고, 단정하고, 건조하며 감상이 끼어들 틈이 없는 그런 스타일을 재현해 보고 싶다"며 "다만 투자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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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 카레 원작으로 박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한다. "최애 작가"인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고 전율했고, 에밀 졸라의 객관적이고 엄정한 문장을 읽고 감탄하곤 했다. 최근에는 사진과 소설이 어우러진 W.G.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고선 뭐라 설명하긴 힘든 기묘한 감흥을 받았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그가 느끼는 것들은 일반 독자들과는 다소 다르다. 그는 명언이나 명구, 중요한 사건에 줄을 치는 게 아니라 영화적 영감을 줄 수 있는 구절에 밑줄을 긋는다.
가령 '박쥐'의 원작 소설인 졸라의 '테레즈 라캥'에선 '퐁네프 회랑은 산책을 할 만한 장소는 아니다. 몇 분을 빨리 가느라 그 길을 지날 뿐이다'와 같은 일반적인 묘사에 줄을 그었다.
박 감독은 문학작품을 영화화할 때 방점을 두는 건 작품 별로 다 다르다고 설명했다. '테레즈 라캥'처럼 별 의미 없는 문장일 수도 있고, 캐릭터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설사 영감을 줬더라도 각색 과정에서 바뀌기 일쑤라고 한다. 예컨대 마르틴 베크 소설의 한 장(챕터)을 토대로 '헤어질 결심' 시나리오를 쓰려했지만, 글을 계속 써나가면서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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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는 박찬욱 감독 |
박 감독은 책에 등장하는 캐릭터, 사건, 묘사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영감을 준다면서 책이 그의 '믿을 구석'이라고 했다. '믿을 구석'은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의 슬로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