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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모험 정신 말살하는 정부 모험자본

조선비즈 배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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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벤처투자 시장은 시장이라기보다는 정부의 정책 집행 통로에 가깝다. 민간 자본이 아니라 정부 자금이 중심에 있고, 투자 판단 역시 시장 논리보다 정책 우선순위에 따라 흐른다. 이 기형적인 구조의 핵심에는 바로 모태펀드가 있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모태펀드는 지난 2000년 닷컴버블 붕괴 이후 황무지가 된 국내 벤처투자 시장을 재건하기 위해 도입됐다. 정부가 ‘마중물’로 벤처투자 초기 자금을 투입하고, 이후 민간 자금 유입을 유도한다는 ‘민간 레버리지’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20년이 넘도록 민간 자금은 여일한 채 정부 투자만 증가했다. 벤처생태계를 키우겠다는 정책적 목적에 따라 정부부처 진흥기금까지 끌어온 조 단위 자금 투입이 계속된 탓이다. 지난해에도 정부는 모태펀드를 활용, 1조3516억원을 출자했다.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VC) 절반 이상이 모태펀드에 기생한다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 모태펀드의 벤처펀드 최대 출자비율은 60%까지 올라섰고, 지난해 전체 벤처펀드 출자액 중 모태펀드 등 정책금융 비중은 23%로 뛰었다.

벤처투자 시장의 모태펀드 의존은 왜곡도 초래하고 있다.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정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벤처투자는 ‘갑’이 돼 일부 운용사에 모태펀드 출자 벤처펀드의 손실 시 운용사가 이를 메우도록 하는 부속 합의서 작성을 요구하고 있다.

부속 합의서에는 손실 이자를 물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운용사가 손실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이자까지 물도록 한 전례 없는 방식으로 ‘수익과 손실을 투자자가 공유한다’는 펀드의 기본 원리마저 깨져버렸다.


한국벤처투자는 운용사로 모태펀드 자금의 우선 회수 요구까지 하고 있다. 최근 한국벤처투자는 한 운용사로 벤처펀드 투자 자산 매도 및 청산 계획 제출을 요구하며 다른 출자자에 우선해 자금을 돌려 달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모태펀드 중심의 왜곡된 국내 벤처투자 시장에서 한국 VC들은 경쟁력을 잃고 있다. 지난해 오픈AI의 투자유치 당시 한국 VC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국내 대형 VC라고 해도 총 운용자산(AUM)이 미국 VC 펀드 1개 규모에도 못 미쳐서다.

모태펀드의 역할을 전면 재정의할 시기가 됐다. 시장 전반에 자금을 퍼붓는 구조가 아니라, 민간이 꺼리는 극초기 창업이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임팩트 투자 등 시장성이 낮지만 미래를 위한 영역에 선택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퇴직연금 자금의 VC 투자 허용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시점이다. 현재 퇴직연금은 원리금 보장 중심으로 운용되지만, 일부를 규제 완화와 안전장치를 통해 벤처투자에 유도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정부가 ‘시장 대체자’가 아니라 ‘시장 촉진자’로 돌아서는 일이다. 벤처자금은 양적으로만이 아닌 질적으로도 성숙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벤처 생태계는 정책 자금이 아니라 시장 자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배동주 기자(dont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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