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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5년, 노근리는 살아 있다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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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1950년 7월25~29일 피란민들을 향해 미군이 쏜 총탄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1950년 7월25~29일 피란민들을 향해 미군이 쏜 총탄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김동훈 | 전국부장



충북 영동군은 대한민국의 정중앙쯤 자리하고 있다. 영동군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가 만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삼도봉’도 있다. 영동은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많아 과일이 풍부하다. 포도와 곶감, 사과 등이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호두도 유명하다.



포도가 탐스럽게 영글어가던 1950년 7월25일부터 닷새간 영동에서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한달이 지났을 무렵이다. 영동에서 미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동군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은 산으로 숨었다. 그런데 미군이 피란을 시켜준다며 주민들을 산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여기에 대전 등에서 피란길에 올랐다가 합류한 사람들까지 대략 500~600명에 이르렀다.



피란 행렬이 노근리에 이르자 미군은 탱크로 길을 막더니 인근 철길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피란민들의 짐을 수색했다. 이불 보따리와 솥단지, 보리쌀 따위였다. 짐 검사를 끝낸 미군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피란민들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했다. 현장은 삽시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여기저기 피가 튀었고 비명과 절규가 이어졌다. 이렇게 숨진 사람이 줄잡아 100여명에 이르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나타난 미군은 살아남은 피란민 400~500명을 근처 쌍굴다리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총격을 가했다. 주검이 쌓여갔고 사람들은 살기 위해 더 안쪽으로 밀착했다. 피란민들은 며칠 동안 굶주림과 한여름 더위에 지쳐 쓰러졌고, 필사적으로 탈출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미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미군은 나중엔 아예 굴다리 안에다 대고 총질을 했다. 훗날 한국 정부는 유족 신고 등을 통해 사망 150명 등 228명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실제 사망자는 400명에 이른다는 게 정설이다.



미군은 도대체 왜 민간인을 향해 총구를 겨눴을까. 피란민 대열에 인민군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제주4·3 사건, 여순 사건처럼 노근리 사건 유족들도 오랜 세월 입을 열 수 없었다.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고 정은용씨 덕분이다. 그도 다섯살 아들과 두살배기 딸을 잃은 유족이었다. 그는 노근리 사건을 상세히 기록해 1960년 10월 미국 정부 앞으로 손해배상 청구서를 보냈다. 미국은 묵묵부답이었다. 정씨는 1994년 장편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펴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노근리의 실상을 담은 실화다. 이를 계기로 한겨레가 보도하고 월간 ‘말’에서 심층 취재하면서 노근리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알려졌다. 이어 에이피(AP) 통신이 당시 노근리에 배치된 미군 병사 10여명을 인터뷰하고 미군 명령서 등 문서 4종을 입수해 1999년 보도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에이피 취재진은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취재진 중 한명이던 찰스 핸리를 3년 전 노근리국제평화포럼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취재가 순탄치 않았다. 보도에 부정적인 사내 간부들을 설득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며 “노근리 사건이 보도되자 미국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알고 있던 역사와 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1년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해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1년3개월간 진상조사를 했다. 미국이 개입한 전쟁 가운데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례적 조처였다. 이젠 한국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아직까지 희생자에 대한 배상·보상도 없다. 2004년에는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피해자 유족 17명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했다.



정은용씨의 아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은 2020년 7월, 노근리 사건을 집대성한 책 ‘노근리는 살아 있다’를 펴냈다. 그는 노근리 사건을 “유족이 만들어온 역사”라고 말한다. 노근리 사건 75년을 맞는 오는 7월25일 미국 워싱턴에서 노근리국제평화포럼 학술행사가 열린다. 주제는 ‘과거를 넘어 미래로’다. 노근리는 반세기에 사반세기가 더해진 세월 동안 이념을 넘어 인권과 평화의 상징으로 승화됐다. 노근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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