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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찬구의 스포츠 르네상스] 만델라의 녹색 유니폼처럼… 공동체 상처 치유하는 리더가 필요하다

조선일보 심찬구 스포티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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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스포츠였던 럭비 월드컵에 등장… 수천만 시청자 눈시울 붉혀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는 외환 위기 절망 속 ‘회복 탄력성’ 증명
2026년 월드컵 본선 진출 확정한 한국… 다시 한번 통합의 기회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던 시기. 럭비는 백인의 스포츠였고, ‘스프링복스’라고 불리던 대표팀은 흑인 다수에게 분노의 상징이었다.

영화 ‘인빅터스’로 유명해진 럭비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날, 만델라 대통령은 스프링복스의 녹색 유니폼을 입고 스타디움에 등장했다. 관중 6만여 명은 숨을 죽였고, 일부는 놀라움과 불쾌감에 휩싸였지만, 이내 만델라의 이름을 연호하며 일제히 일어섰다. TV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수천만 시민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인종차별 정책으로 분열되었던 과거의 상처를 직면한 채 국가의 미래를 향한 통합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가 입은 유니폼은 용서의 메시지였고, 우승컵을 들며 백인 주장과 포옹하는 장면은 과거를 넘어 미래를 품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럭비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닌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언어가 되었다.

만델라가 만든 역사적 장면은 오늘날에도 질문을 던진다. 공동체가 분열된 시대에 스포츠가 제공하는 ‘다시 시작하는 힘’은 무엇인가? ‘통합과 연대’가 과제인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같은 질문이 던져진다.

이처럼 스포츠는 사회의 ‘회복 탄력성’을 작동시키는 플랫폼이다. 사회학자 마이클 웰먼(Michael Wellman)은 회복 탄력성을 “외상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공동체가 핵심 기능과 관계망을 유지하며 회복하고 재구성하는 집합적 능력”이라 설명했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은 복합 위기의 시대에 회복탄력성을 ‘불확실성 속에서 사회가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구조적 자산’이라 정의했다. 그리고 회복탄력성은 단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넘어 더 나은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회복 탄력성은 네 가지 구성 요소를 전제로 한다. 공동체의 유대, 감정의 공유, 제도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집합적 상상력. 이 네 가지를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는 사회적 장치는 드물다. 스포츠는 기억과 서사의 과정을 직관적이고 감정적으로 충족시키는 플랫폼으로써 공동체 회복의 계기를 제공한다.

한국 사회는 최근 극한의 정치적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겪었다. 계엄, 탄핵, 그리고 치열했던 대선까지, 공동체의 신뢰는 무너졌고, 사회적 피로감은 누적되었다. 세대·계층·양성 간 균열도 깊어졌다. 온라인상에서는 증오와 혐오, 조롱이 일상화되었다. 정치에서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고, 언론이 진영 논리에 기반하여 분열을 조장하는 가운데, 공동체 의식은 소진되었다. 갈등의 총량이 커질수록, 그것을 회복시키는 문화적 장치가 절실하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서로를 신뢰하고 함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래픽=이철원

그래픽=이철원


그 답을 우리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1997년 시작된 외환 위기 이후, 실업과 부채, 구조 조정이 일상화됐고, 청년 세대는 ‘잃어버린 10년’을 예고받으며 절망했다. 경제 시스템의 붕괴와 더불어 사회 곳곳에 갈등과 절망이 겹겹이 쌓였다. 빈부 격차 심화, 지역감정, 세대 간의 불신으로 사회는 불안정했고, 국민의 자긍심은 바닥을 쳤다.


경제 위기의 끝에 2002년 대한민국은 축구로 다시 일어섰다. 공동 주최국 대한민국의 히딩크호는 강호들을 차례로 꺾으며 4강에 진출했고, 그 과정은 국민의 축제로 승화되었다. 700만이 전국의 광장을 메운 채 “대~한민국!!”을 외친 거리 응원은 계층과 지역, 세대를 넘어 하나로 만들었다. 태극기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무엇보다 주최국으로서 완벽한 운영과 성숙한 시민 의식은 전 세계의 찬사를 이끌어냈고, 이는 국민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게 했다. 4강 신화는 회복의 메시지로 작용했고, 스포츠가 국가와 사회의 정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증명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된다.

스포츠는 단지 메달을 위한 경쟁이 아니다. 스포츠는 사회적 감정을 회복시키는 촉매이자, 공정성과 연대를 학습하게 만드는 사회적 장치다. 선수는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한 승리에 환호하며 패배를 딛고 일어서며, 팬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 패배의 아픔을 함께 위로하며 다시 다음 경기를 기다린다. 이 과정을 통해 공동체는 연대를 경험한다.

2025년 6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2026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지었다. 한국 축구, 즉 스포츠가 우리 공동체에 회복과 통합의 계기를 만들어 줄 또 한 번의 기회다.


그러나 체육계 리더십은 작년 이래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한체육회의 공정성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1.2%에 달했다. 이는 국민이 스포츠에 기대하는 사회적 가치, 즉 공정·연대·리더십이 무너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대한축구협회 역시 절차적 정당성, 투명성과 공정성에 기반한 행정에 대한 사회의 질타가 여전하다.

따라서 이제부터 본선까지의 여정에서 축구협회와 대표팀은 단순한 경기 결과만이 아닌 내부 개혁과 체질 개선이 수반된 공정한 리더십과 투명한 절차, 높은 수준의 가치 추구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과정을 보여줘야 한다. 단지 잘 싸우는 팀이 아닌 올바르고 멋지게 싸우는 팀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우리 사회는 스포츠를 통해 분열된 상처를 치유하고, 통합의 계기를 맞이할 수 있다.

만델라가 보여준 상징적 행동은 과거의 상처를 덮으려는 것이 아닌, 그 상처를 정면으로 껴안는 용기였다. 마치 경기가 끝나고 승자와 패자가 유니폼을 바꿔 입으며 서로를 안아주고 격려하듯, 상처받은 장본인이 먼저 내민 손길은 백 마디 말보다 강한 신뢰를 만들어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도 이러한 상징적 순간일 것이다. 통합과 회복의 시간, 스포츠맨십의 회복과 리더의 용기가 필요하다. 스포츠는 다시 뛰는 대한민국 공동체의 통합과 연대를 위한 강력한 매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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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찬구 스포티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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