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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잉글랜드 농노제 기반을 허문 농민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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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3 와트 타일러의 날

1381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와 대면한 와트 타일러의 농민군.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 그림. 위키피디아.

1381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와 대면한 와트 타일러의 농민군.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 그림. 위키피디아.


1381년 6월 13일 와트 타일러의 농민(평민)군이 잉글랜드 수도 런던에 입성했다. 농민군은 미처 피신 못한 제후와 영주들을 도륙하고 막강한 권력을 쥔 거대 수도원과 장원들, 기사단과 법원 등을 덮쳐 토지문서 등을 불태웠다. 런던의 수많은 평민들이 합류하면서 농민군 규모는 최대 6만여 명에 달했다. 백년전쟁(1337~1453) 첫 전투를 위해 1340년 도버해협을 건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플랑드르 연합군(약 1만 명)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당시 만 14세의 어린 군주 리처드 2세는 윈저궁을 떠나 고위 귀족들과 함께 런던탑 요새에 피신했다.

반란 계기는 백년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과한 과도한 인두세와 징수 과정의 횡포였다. 오랜 전쟁으로 농민 등 평민 노동력 부족 사태가 심화한 데다 1348년의 흑사병으로 치명타를 입은 뒤였다. 리처드 2세의 아버지이자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등의 활약으로 우세하던 전황도 1369년 프랑스 샤를5세 즉위 이후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다. 1377년 즉위한 리처드 2세의 섭정 귀족들은 봉건 경제 시스템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징세에 열을 올렸고, 당연히 부패도 만연했다. 흑사병 이전 호적을 근거로 인두세를 징세하는 예가 흔했고, 면세 목적으로 출생 신고를 안 하는 이들도 허다했다. 탈세자 색출 및 처벌이 점차 강화됐고 갈등과 충돌도 빈번했다. 1381년 5월 30일 런던 북동부 에식스주에서 시작된 농민 반란이 채 보름도 안돼 수도까지 삼킨 거였다. 반란군의 요구는 세금 삭감과 농노제 철폐, 부패 법관 등 관료 처벌이었다.

반란 열기는 6월 15일 농민군 지도자 와트 타일러가 국왕과의 협상 도중 왕실 근위병들에 의해 피살되면서 기세가 꺾여 그해 11월 완전 진압됐다. 하지만 세금 추가 인상은 저지됐고 농노제도 도시 상공업 발달 및 농촌 인구 유출, 농업 임금 상승 등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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