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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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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19일 가로, 세로, 높이 1m 구조물 안에 자신을 가두고 농성 중인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 하청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던 그는 대우조선해양으로부터 47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서를 받았다. 공동취재사진

2022년 7월19일 가로, 세로, 높이 1m 구조물 안에 자신을 가두고 농성 중인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 하청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던 그는 대우조선해양으로부터 47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서를 받았다. 공동취재사진




이세영 | 정치부장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산다. ‘이대로는 살 수 없는’ 사람과 ‘이대로도 살 만한’ 사람. 갈등과 쟁투로 점철된 세상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건 둘의 머릿수가 엇비슷하거나 ‘이대로도 살 만한’ 사람이 조금 더 많아서인지 모르겠다. 문제는 ‘이대로 살 수 없는’ 이들의 수가 상당함에도 시설물을 점거하거나, 고공에 오르거나, 스스로를 철창 안에 가두는 극한의 몸부림을 동반하지 않는 한 그들의 존재가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이 ‘이대로도 살 만한’ 이들과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는 시기는 공직자를 뽑는 때가 유일해 보인다. 자산이 많든 적든 배움이 길든 짧든, 선거에선 모든 이의 욕망이 똑같은 한표로 교환되기 때문이다.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난 5월18일 대통령 후보자 1차 티브이(TV) 토론회에서 민주노동당 후보 권영국이 한 이 말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23년 전 권영길 후보의 말처럼 널리 회자되진 못했어도 말이 품은 무게는 그 이상이었다. 이 말이 처음 지상에 활자화된 건 2022년 7월이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유최안이 1㎥ 쇠우리에 제 몸뚱이를 가두면서 이 비장하고 서늘한 구호를 철창 밖에 걸어놓았던 것이다. ‘이대로는 살 수 없어’ 옮겨 간 공간이 도무지 그대로는 살 수 없어 보이는 한여름의 0.3평 철창이었다니.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임을, 철창 밖 삶이 철창 안 삶과 다를 바 없음을 유최안은 온몸으로 증언하려 했던 것 같다.



그 유최안이 3년 전 자발적 ‘입감 투쟁’으로 공론화하려 했던 것은 하청노동자가 사용자인 원청기업과 근로조건을 직접 교섭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사용자의 범위를 원청기업으로 확대하고, 파업 등 정당한 노조 활동 과정에서 발생한 손해에 대해 고의나 중과실이 없는 한 사용자가 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에 담겼다.



공동체를 규율하는 법 중에는 ‘이대로 살 수 없는 이들’의 절규가 아니었으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법들이 많다.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장애인복지법 같은 사회법들은 ‘이대로도 살 만한’ 강자의 선의에 빚지지 않았다. 노동계의 숙원이던 노란봉투법을 원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하게 만든 것도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심정으로 한여름의 조선소 도크를 점거한 유최안과 그의 동료들이었다.



두차례나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음에도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노란봉투법은 이번 대선에서도 중요한 의제였다. 1차 티브이 토론에서 “헌법에도 민법에도 맞지 않는 노란봉투법을 대통령이 되면 또 밀어붙일 것인가”라는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의 질문에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내놓은 답은 명쾌했다. “대법원 판례가 인정하고, 국제노동기구(ILO)도 다 인정하는 법안이라 당연히 해야 한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전 여러차례 노란봉투법 재추진 의사를 밝혔다. 5월1일 노동절 메시지를 통해 “노조법 2·3조를 개정해 교섭권을 강화하고,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로 인한 고통을 줄이겠다”고 했고, 한국노총과의 정책 협약식에선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 노동이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입법 의지를 재확인했다. 노란봉투법은 이재명 대통령의 10대 공약에도 포함됐다.



문제는 표를 향한 절박감이 사라지는 ‘선거 이후’다. 야당 시절엔 기회 있을 때마다 ‘민생’과 ‘약자 권익’을 강조하다가 집권 뒤엔 ‘국가적 위기상황’을 내세워 약속했던 입법을 미루거나 ‘여야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법 자체를 누더기로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탓이다. ‘사용자의 작업장 안전관리 책임을 강화해 일하는 사람의 생명을 지키자’며 만든 중대재해처벌법의 원안을 ‘협치’라는 명분 아래 큰 폭으로 후퇴시킨 2021년의 집권 민주당이 그랬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대로 살 수는 없는’ 이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 법한 성장 배경을 지녔다. ‘이대로는 살 수 없는’ 많은 이들이 그에게 표를 몰아준 이유일 것이다. 사상 첫 소년공 출신 대통령에게 의지의 진실함을 입증할 입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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