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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이은화의 미술시간]〈374〉

동아일보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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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여인이 난간 뒤에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하얀 모자와 숄을 걸친 채 오른손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옷소매에선 하얀 종이가 튀어나와 있다. 살짝 벌린 입으로는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다. 도대체 이 여인은 누구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조르조네가 그린 ‘늙은 여인’(1506년·사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가장 놀랍고도 매력적인 초상화 중 하나다. 33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조르조네는 화가 경력도 짧고 남긴 작품 수도 많지 않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적인 풍경화와 초상화로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그림은 그가 군주나 귀족이 아닌 평범한 노인을 단독으로 그린 유일한 초상화라 더욱 특별하다. 그림 속 모델은 화가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르조네가 그리려던 주제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다. 여인의 소매에서 튀어나온 하얀 쪽지에는 검은 글귀가 적혀 있다. ‘Col Tempo.’ ‘시간이 지나면’이란 뜻의 라틴어다. 이 짧은 문장이 바로 화가가 전하고자 했던 주제이자 메시지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사유, 즉 노화와 죽음에 대한 사유를 표현한 것이다.

그림 속 여인은 죽음 앞에서 결코 슬퍼하거나 절망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두려워하는 표정도 아니다. 오히려 화면 밖 감상자들을 안타깝고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오랜 세상살이를 통해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깨달은 통찰자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500여 년 전 그림이지만 노파는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 밖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진다. 부도, 권력도, 젊음도, 아름다움도.” 인간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공평해지는 법. 그러니 집착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 같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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