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배태용 기자] 한국 정부가 반도체를 '국가전략기술'로 규정하고 산업 경쟁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메모리 초격차 유지, 시스템 반도체 육성, 공급망 리스크 대응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 아래, 대규모 R&D 예산, 세제 혜택, 인력 양성 프로그램이 본격 가동되고 있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는 이 같은 집중적 지원의 방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특히 팹리스 중심의 중소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은 제도적 지원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실질적 체감도가 낮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시스템 반도체 지원 정책을 다각도로 확대하고 있다. 올해 초 발표된 K-반도체 전략 개정안에는 R&D 예산 확대, 법인세 감면율 상향, 전문인력 양성 트랙 도입 등이 포함됐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파운드리·메모리 투자를 뒷받침하는 방향성이 중심이며, 소재·부품·장비와 함께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육성'이라는 명분도 강조됐다.
하지만 '설계'를 담당하는 팹리스 기업, 특히 중소·스타트업 기업들은 지원제도가 운영 중임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체감하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정부의 기술개발 과제나 클러스터 인프라 대부분이 대기업과의 공동 프로젝트, 또는 매출 기준이 일정 수준 이상인 기업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한 중견 팹리스 대표는 "설계 인력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테스트베드 접근조차 쉽지 않다"라며 "파운드리 연계도 결국 대기업 우선이어서 초기 양산화는 매번 '산 넘어 산'"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예산 배분 문제를 넘어 산업 생태계의 비대칭 구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메모리 중심의 대기업 주도 산업 구조에서 팹리스는 '첨단 전략산업'의 일원이면서도 동시에 시장 밖의 존재로 밀려나는 모순이 발생한다. 특히 AI 반도체, 자동차용 반도체 등 신시장 개척이 팹리스 중심으로 전개되는 현실을 고려할 때, 현재 정책의 실질적 경쟁력 확보와의 엇박자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의 '국가전략기술 세액공제' 제도도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유리한 구조다. 설계 전문 인력을 다수 보유한 대형 팹리스, 또는 시스템반도체 전담 부서를 갖춘 종합 반도체 기업이 대상이 되기 쉽다. 소규모 팹리스 스타트업은 대부분 인건비 지원이나 간접비성 예산을 제외한 순수 기술개발 중심 과제에는 접근이 어렵고, 실제로 지원 제도가 있음에도 체계적인 정보 접근이나 맞춤형 설계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논의된 반도체 관련 세제 개편안에서도, 대기업 중심의 설계 R&D 인프라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중소 팹리스의 현실을 반영한 보완책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정치권 역시 이에 대한 자각은 있는 분위기다. 올해 상반기 중 여야 모두 반도체 특별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핵심은 중소 반도체 기업에 대한 맞춤형 인력지원과 테스트베드 공동 활용 체계 마련, 팹리스-파운드리 간 상생협력 의무 조항 신설 등이다. 다만 실제 법안 심의 과정에서는 이해관계와의 조율 등으로 당초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도 공존한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정부 정책은 산업 전반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보다, 단기적 수치 성과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진단, 생태계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메모리 초격차와 파운드리 점유율 확대는 중요하지만, 이를 받쳐줄 설계·소프트웨어 중심의 팹리스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 유럽, 대만 등도 자국 내 팹리스 육성을 위한 민관합동 플랫폼을 구축 중"이라며 "한국도 단순한 재정지원에 그치지 않고, 시장 연계형 테스트베드, AI·차량용 반도체 특화 지원, 설계 자산(IP) 공유 등 실질적인 접근성 개선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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