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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권’이란 무엇인가 [박찬승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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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21대 대선의 유세에서 이재명 후보는 ‘국민주권 정부’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취임 선서 뒤 연설에서도 ‘국민주권’이라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이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의 ‘참여정부’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국민주권 정부는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보다는 그 의미가 바로 와닿지 않는다.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주권’이란 무엇일까. 주권(sovereignty)이란 용어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말이다. 서양에서도 이 개념은 16~17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그 이전 로마 교황의 권위와 간섭 아래 놓여 있던 유럽 각 지역의 왕국, 제후국, 도시 정부 등이 스스로 독립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주권이었다.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은 유럽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유럽 각 지역의 국가들은 이 조약을 통해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종교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확립했으며, 각 국가를 독립된 실체로 인정했다. 이로써 각 국가는 독립성과 최고 통치성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주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권은 처음에는 당연히 각국 국왕의 것이었다. 그러나 1776년 미국 독립, 1789년 프랑스 혁명 등을 거치면서, 국민이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였다. 여기에서 국민주권 혹은 주권재민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그리고 국민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로서 의회로 상징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만들어졌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 여전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 체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중국 주변의 국가들은 완벽한 독립성과 최고 통치성을 갖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1860년대에 중국에서 한 선교사가 펴낸 영화(英華)사전에서 ‘sovereignty’(소버린티)를 주권이라 번역하였고, 이후 다른 사전들도 이를 따랐다.



한국에 국민주권의 개념이 들어온 것은 1880년대였다. ‘한성순보’ 1884년 2월7일치에 실린 ‘민주주의와 각국의 장정(헌법) 및 공의당(의회)에 대한 해석’이란 글을 보면, “서양 각국에서 행한 여러 제도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이 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놀랍게도 이 글은 주권이란 단어는 쓰고 있지 않았지만, 내용상으로 ‘국민주권론’ ‘인민평등론’을 말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발간된 책 가운데 주권이란 단어를 처음 언급한 것은 1895년에 발간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이를 보면, “나라의 권리는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내재적인 주권으로 나라 안의 모든 정치와 법령이 그 정부가 세운 헌법을 스스로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재적인 주권으로 독립과 평등의 원칙에 따라 외국과 교섭을 갖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권을 대내적으로 헌법과 법률에 기초한 통치권, 대외적으로 외교에서의 자주권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후 주권이란 말은 통치권과 자주권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그러나 여전히 군주국이었던 대한제국기에 국민주권이란 말은 불온한 말로 금기시되었다. 한국사에서 이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였다. 그해 9월 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법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이었고,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있음”이었다. 1927년 이를 개정한 임시약헌의 제1조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국권은 인민에게 있음”이라 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의 마지막 임시헌장도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제4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 전체에 있음”이라 하였다.



1948년 제헌헌법을 만들 때 국회는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을 계승하여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국민주권 조항이 정식으로 헌법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의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주권재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로 인하여 국민주권의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이 조항이 다시 살아난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의 자유를 되찾고 참정권(대통령 직선제)도 되찾아 국민이 비로소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보면, 우리 역사에서 국민주권이 실행되기 시작한 것은 40년이 채 안 된 셈이다.



한겨레 지난 5월15일치 기사에 의하면, 한겨레와 한국정당학회, 여론조사업체 에스티아이가 진행한 ‘2025~26 유권자 패널조사’에서 유권자 76.9%는 ‘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항상 낫다’고 답했지만, 13.9%는 ‘상황에 따라서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낫다’, 3.9%는 ‘민주주의나 독재나 상관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약 18%의 유권자가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리인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우선 정부 안팎에서 내란의 주체 세력과 비호 세력을 말끔히 척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힘써야 할 일은 시민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뿌리를 굳건히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 일반인, 공무원, 군인 등 각계각층의 민주시민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또 국민주권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각종 법률을 고치고, 필요하다면 헌법도 개정해야 한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투표 이외의 방법으로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국정운영에서 거버넌스를 확대하고, 지방자치에서 국민발안제를 도입하고, 재판에서 배심원제를 확대하는 등 검토해볼 만한 제도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든가, 기득권을 발판으로 특권계급이 되고자 하는 행태를 용납하지 않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을 새 정부와 국회의 중요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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