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열린 2기 진실화해위 조사기간 만료 기자간담회에서 박선영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10분으로 예정됐던 인사말을 무려 45분간 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정부는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자유대한민국의 체제전복을 기도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헌정질서를 지켜나가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 선포문)
“파렴치한 범죄자들 처리를 못 했기 때문에 오늘날 나라가 이 모양이다. 국기를 문란하게 하는 자들이 판치는 대한민국, 청소 좀 하고 살자.” (박선영 진실화해위원장의 지난해 12월4일 페이스북 글)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 운운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한 다음 날, 박선영 당시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도 페이스북에 “파렴치한 범죄자들을 청소하자”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문맥상 전날 선포된 비상계엄을 적극 옹호하는 취지로 읽혔다. 박 이사장은 이틀 뒤인 12월6일 장관급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에 전격 임명됐다. 군·경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에 불법 진입하는 등 ‘내란 행위’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었던 ‘범죄 혐의자’ 대통령이 범행 직후 장관급 인사의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10일 진실화해위원장 취임식이 진행됐다. 이날 아침 박 위원장은 다시 페이스북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국가의 독립 조사위원장직 취임을 거부하고,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헌정 유린’이다. 인사를 투쟁의 목적으로 삼아 법치주의를 말살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란 행위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자신의 임명을 반대하는 진실화해위 내부 구성원과 국가폭력 희생자 유가족을 겨냥한 글이었다. 이 역시 야당 등 비판 세력에 대해 “내란을 획책하는 명백한 반국가행위”라고 적반하장으로 규정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문과 판박이였다.
지난달 26일 열린 2기 진실화해위 조사기간 만료 기자간담회에서 박 위원장의 말을 듣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6개월 전의 그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 위원장은 이날 국가폭력 희생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답고 번지르르한 말만 했다. “필설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숱한 아픔과 상처를 안고 지금도 어둠 속에서 고통받고 계신 분들을 돕고 진실을 구축해 나가야 합니다. 그 진실을 바탕으로 우리 국민 모두 정말 화해로 나가야 하고 더 이상 분열해서는 안 됩니다.” 10분으로 예정된 박 위원장의 인사말은 무려 45분간이나 이어졌다. 기자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인내심을 테스트해야 했다.
박 위원장은 본인의 임명 과정과 관련해 “지난 여름부터 (진실화해위원장) 인사검증을 받았다. 그런데 계엄이라는 엄청난 일과 겹쳐서 발표되다 보니 느닷없이 우박을 맞았다”며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본 것처럼 말했다. 2기 진실화해위의 해외입양 등 주요 조사 사건의 성과를 설명할 때는 피해자들과 관련해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5차례나 했다. 국가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은 비상계엄이라는 국가폭력 미수 사건에 적극 호응했던 인물의 입을 통해 인권침해 피해자를 연민하는 말을 들으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연민이 가짜가 아니라는 듯, 박 위원장은 최근 일부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있다 . 지난달 22일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에서 열린 납북피해 어부 재심 선고 공판에 참석해 무죄가 선고된 장 아무개씨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29일에는 수용시설피해자 특별법 제정 등을 요구하기 위해 국회 의원회관에 오르 다 추락해 중상을 입고 입원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씨를 문병 간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문제는 함께 올린 글이었다 . “6개월 후면 진실화해위는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니 당사자, 피해자들로서는 얼마나 열불이 터지겠는가? 앞길이 깜깜하지 않겠는가?”
본래 2기 진실화해위의 기간 연장을 원하는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이 많았다. 하지만 비상계엄 직후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한 박 위원장이 취임하자 이들의 생각은 기간 연장이 아닌 종료 쪽으로 바뀌었다. 박 위원장이 주요 의사결정 회의인 전체위원회에서 특정 사건에 대해 보편적인 인권 기준에 반하는 주장을 하거나 결정을 내리고, 국회에 나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됐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발언하는 것을 보면서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박 위원장은 이런 움직임은 전혀 모르는 척하며, 피해자를 내세워 2기 진실화해위의 기간 연장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진실화해위 안팎에서는 “박선영 위원장이 중도 사퇴하고 2기 연장을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박 위원장은 사퇴 의사가 전혀 없고, 결국 박 위원장이 없는 3기 진실화해위의 신속한 출범이 대안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박 위원장이 과연 ‘책임 있는 마무리’를 할 수 있느냐다. 지난달 말 진실화해위 내부망 자유게시판에는 “주요 간부회의에서 확정된 조사1국의 종합보고서 목차가 (지방 좌익 등) 적대 세력 사건 등 특정 사건 유형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어, 위원회의 전체 활동 성과나 실제 역사적 현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이 올라왔다. 2기 진실화해위는 남은 6개월 동안 종합보고서 작성에 집중하게 되는데, 박 위원장의 편향적 시각으로 보고서가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이제 박 위원장은 새 정부의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이는 지난해 12월6일 박 위원장이 진실화해위원장에 임명되면서 정해진 일이었다. ‘내란세력 알박기 1호 인사’라는 낙인은 쉽게 지워질 수 없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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