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설 현장 8년 경력 바트도르찌
6만 단어 포함 한국어학습서 초고 완성
"한글, 한국어 그 이상 몽골에 알리고파”
“제가 ‘몽한 사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 사장님들의 격려도 격려지만, 한글의 우수성 덕분이에요. 문자 탄생 배경을 알면 더 대단하죠.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이 절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할까요?”
열아홉의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공장과 건설 현장을 누비던 몽골인이 한국어종합학습서를 낸다. 현재 울란바토르 시내 유학원(ACP)에서 한국어 강사 겸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바트도르찌(47·바타)가 그 주인공. 그는 “28년 동안 한 단어 한 단어 모으다 보니 6만 개나 됐고, 그간 익힌 나름의 한국어 문법까지 쉽게 정리했다”며 “한국어를 배우려는 많은 몽골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확신은 출간 준비 중인 학습서의 서문에서도 드러난다. 총 5부로 된 책에선 글자 체계를 정리해 발음법과 품사, 문장 성분과 구조를 정리했고, 자신이 한국어를 익히면서 고안한 350개 문법을 몽골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다. 특히 마지막엔 6만 개 단어로 된 몽한 용어집을 붙였다. 바타는 “문법과 어휘를 한 권에 수록했다”며 “육아나 집안 형편 때문에 한국어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입문자들도 독학으로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한 게 최대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낀 인구 350만의 몽골 내 한국어 학습자 수는 영어와 러시아어에 이어 3위다. 일본어(4위), 중국어(5위), 독일어(6위)를 크게 앞선다.
6만 단어 포함 한국어학습서 초고 완성
"한글, 한국어 그 이상 몽골에 알리고파”
몽한 사전(용어집)을 만든 몽골인 한국어 강사 바트도르찌가 울란바토르 시내 서점에서 판매 중인 자신의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바트도르찌 제공 |
“제가 ‘몽한 사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 사장님들의 격려도 격려지만, 한글의 우수성 덕분이에요. 문자 탄생 배경을 알면 더 대단하죠.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이 절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할까요?”
열아홉의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공장과 건설 현장을 누비던 몽골인이 한국어종합학습서를 낸다. 현재 울란바토르 시내 유학원(ACP)에서 한국어 강사 겸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바트도르찌(47·바타)가 그 주인공. 그는 “28년 동안 한 단어 한 단어 모으다 보니 6만 개나 됐고, 그간 익힌 나름의 한국어 문법까지 쉽게 정리했다”며 “한국어를 배우려는 많은 몽골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확신은 출간 준비 중인 학습서의 서문에서도 드러난다. 총 5부로 된 책에선 글자 체계를 정리해 발음법과 품사, 문장 성분과 구조를 정리했고, 자신이 한국어를 익히면서 고안한 350개 문법을 몽골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다. 특히 마지막엔 6만 개 단어로 된 몽한 용어집을 붙였다. 바타는 “문법과 어휘를 한 권에 수록했다”며 “육아나 집안 형편 때문에 한국어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입문자들도 독학으로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한 게 최대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낀 인구 350만의 몽골 내 한국어 학습자 수는 영어와 러시아어에 이어 3위다. 일본어(4위), 중국어(5위), 독일어(6위)를 크게 앞선다.
몽한 사전(용어집)을 만든 몽골인 한국어 강사 바트도르찌가 1997년 6월 주차장 건설 현장에서 전기 설비 공사를 하고 있다. 바트도르찌 제공 |
그가 몽골인이 한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확신하는 데는 온몸으로 부딪쳐 익힌 한국어가 있다. 1997년 봄, 인사말 하나 모른 채 입국한 그는 건설 현장을 옮겨 다니면서 일을 했는데, 고된 나날이 이어져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 것은 신문 ‘보는’ 일이었다. “무작정 신문을 봤어요. 읽을 순 없었지만 자음과 모음이 보이기 시작했고, 뜻은 몰라도 읽어내니 사장님들이 신기해하면서 이것저것 알려주셨죠.” 6개월쯤 되니 사람들과 대화가 됐다. 비슷한 교착어에 어순까지 유사해 몽골인들이 한국어 습득에 유리하다고는 하나, 수첩과 펜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새로 보는 단어나 새로운 생각들을 수시로 메모하는 습관, 쉬는 주말엔 서점에 나가 책을 읽을 정도로 남달랐던 한국어 학습 열정 덕분이기도 했다.
한국어 배우는 즐거움에, 또 이를 통해 한국과 한국인들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그도 1997년 말 닥친 IMF 사태를 비켜갈 수 없었다. “일자리가 싹 사라지고 월급도 못 받고 거리로 나앉았죠. 몽골로 돌아가 부모님이 원했던 교대 진학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접으면 앞으로 제 인생에 닥칠 또 다른 난관에서도 포기할 것 같더라고요. 좋아하는 한글, 한국어가 있으니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구직 정보지에 나온 회사에 전화를 수도 없이 돌렸고, ‘한번 만나보자’는 데는 다 찾아갔다. 그러다 공장 내 반지하방을 내준다는 중소기업에 일자리를 얻었다. “난방도 안 되는 곳이었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뻤던지 모릅니다.”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나자 몽골에도 한국어 학습서가 나왔고, 부모님이 보내준 그 서적으로 한국어 실력을 고도화했다. 1990년 한국과 수교한 지 9년가량 지난 때의 일이다.
한국에서 8년 동안 ‘외국인 근로자’로 살던 바타는 2005년 몽골로 복귀했다. 이후 대학에 진학, 경제학을 공부한 뒤 한국기업 등에서 근무하다 독일에서 독일어를 1년 반 공부한 뒤 2022년 한국어학원 강사로 자리를 잡았다. 점점 더 많은 몽골인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지만 시간과 경제적 이유로 전문 기관의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이들을 돕는 게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과 양국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바타의 꿈은 ‘한글센터’를 설립하는 일. 그래서 전문가들의 감수 도움 등을 통해 한국어종합학습서를 내면 판매금 전부를 이곳에 투입할 계획이다. “한글은 디지털 시대 가장 적합한 문자 체계예요. 제 생각에는 장래에 국제 공용 문자, 언어로도 부상할 수 있습니다. 센터를 세워 한글과 한국어 그 이상을 몽골에 알릴 필요와 이유는 충분합니다.”
몽한 사전(용어집)을 만든 몽골인 한국어 강사 바트도르찌가 울란바토르 시내 한국어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바트도르찌 제공 |
세종= 정민승 기자 msj@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