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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자의 사談진談/송은석]50년 전 퓰리처상의 진짜 주인은?

동아일보 송은석 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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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은 이 사진은 AP통신 사이공(현 호찌민) 지국 직원들이 닉 우트의 퓰리처상 수상 소식을 축하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운데 반팔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인물이 닉 우트이며, 그의 옆에 선글라스를 쓰고 샴페인 병을 든 사람이 칼 로빈슨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호르스트 파스다. AP 뉴시스

1973년 5월,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은 이 사진은 AP통신 사이공(현 호찌민) 지국 직원들이 닉 우트의 퓰리처상 수상 소식을 축하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운데 반팔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인물이 닉 우트이며, 그의 옆에 선글라스를 쓰고 샴페인 병을 든 사람이 칼 로빈슨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호르스트 파스다. AP 뉴시스


송은석 사진부 기자

송은석 사진부 기자

최근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된 다큐멘터리 ‘The Stringer’가 베트남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네이팜탄 소녀’ 사진 촬영자 닉 우트의 저작권에 의문을 제기했다. 요즘처럼 촬영 시간과 카메라 기종 정보가 자동으로 기록되는 디지털 시대였다면, 애초에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필름 시대엔 사진기자들이 필름을 언론사에 맡긴 뒤 현상과 인화가 끝날 때까지 자신이 어떤 장면을 담았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통신사 내부의 업무 처리 방식, 프리랜서 사진기자의 불안정한 입지, 그리고 전장의 혼란 속에서 뒤섞였을지도 모를 필름. 한 장의 사진을 두고, 네 명의 기억이 충돌한다. 관련 기사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각색해 보았다.

① 닉 우트(AP통신 기자·퓰리처상 수상자)

1972년 6월 8일, 나는 사이공(현 호찌민)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를 취재하고 있었다. 동료들과 철수하려던 찰나, 뜨랑방에 네이팜탄이 떨어졌다. 불붙은 들판을 헤치며 아이들이 달려나왔다. 그중 아홉 살 소녀 판티킴푹은 옷이 모두 타버린 채 울부짖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러고 난 뒤 다친 아이들을 취재 차량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했다. 나는 그때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상과 세계보도사진상을 받았다. 내 삶을 바꾼 그 사진은 지금도 거실 한편에 걸려 있다.

② 응우옌타인응에(스트링어)

나는 NBC 팀의 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평소엔 장비를 나르고 취재 차량을 몰았지만,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폭격이 마을을 덮쳤을 때 나도 카메라로 아이들의 모습을 찍었다. 나는 그 필름을 AP통신에 넘겼고 20달러를 받았다. 그런데 다음 날 내 사진은 닉 우트의 것이 됐다. 그는 정직원이었고, 나는 스트링어(비정규직 프리랜서)였다. 그는 유명해졌고, 나는 잊혔다. 왜 이제서야 고백하냐고? 그땐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지더라. 그 사진을 찍은 건 분명히 나였다.

③ 칼 로빈슨(포토 데스크)

나는 사이공 AP 편집국에서 포토 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그날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과 함께 필름이 도착했고, 현상된 필름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문제는 필름에 촬영자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누가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사진부장 호르스트 파스가 조용히 말했다. “우트가 찍은 걸로 해.” 그때는 프리랜서보다 사내 기자의 이름이 우선시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고, 그게 조직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덮어버린 진실에 나는 늘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④ 데이비드 버넷(스트링어)

나는 당시 타임지와 라이프지에 사진을 제공하던 스트링어였다. 그때 나는 필름을 빼내고 있었다. 내 라이카 카메라는 필름 교체가 유독 까다로운 기종이었다. 그 순간, 멀리서 불기둥이 솟구쳤고 아이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우트가 제일 먼저 뛰쳐나갔다. 젠장! 겨우 필름을 갈아 끼운 나는 30초가 지나서야 그를 따라잡았다. 그 30초 때문에 나는 우트가 킴푹을 카메라로 담는 순간을 눈으로만 봐야 했다. 몇 시간 뒤, 나는 암실 밖에서 사진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우트가 막 인화한 5X7 흑백 사진 한 장을 들고 나왔다. 그 사진은 다음 날 아침 전 세계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반면, 그날 내가 찍은 사진들은 수십 년 넘게 아카이브에 잠들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AP통신은 자체 조사 끝에 90페이지가 넘는 장대한 보고서와 함께 우트의 저작권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월드프레스포토는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며 촬영자 미상으로 처리했다. ‘네이팜탄 소녀’ 사진은 현재 밀착 인화 한 장 없이, 단 두 컷짜리 필름 조각으로만 남아 있다. 촬영자를 특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영화 ‘라쇼몽’을 통해 하나의 진실을 두고도 각기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줬다. 우트는 자신이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응에는 그 사진이 자신의 것이라 기억한다. 로빈슨은 이름을 정해야 했고, 버넷은 우트가 찍는 걸 눈으로 봤다. 시간은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고, 주관만을 선명하게 남긴다. 라쇼몽의 숲이 아닌, 뜨랑방 들판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당신이라면 누구의 셔터를 믿겠는가. 그리고 그 믿음은, 확실한가?

송은석 사진부 기자 silver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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