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
뜬금없는 곳에서 유명 드라마의 대사가 떠올랐다. 색깔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이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며 내뱉었던 말, "넌 모르잖아, 알록달록한 세상".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선거 벽보를 보면서다.
파란색,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선거철을 맞아 각 정당을 상징하는 색깔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후보들의 공약집을 보고 있자면 '알록달록한 세상'이 잘 보이질 않는다. 정당들이 내세운 색깔만큼 다채로운 이념이나 철학의 시각차를 읽어내기엔 역부족이다. 부실한 공약, 갈등과 반목만 두드러지는 게 이번 대선의 현주소다.
공약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다. 선거를 앞둔 후보자들이 국민들과 맺는 계약이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청사진을, 사회적으로는 시대정신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의 지향점 역할을 하는 게 공약이다. 하지만 후보들의 공약과 토론에는 청사진과 시대정신, 지향점이 잘 보이질 않는다.
공약에 대한 관심이 멀어진 탓인지, 공약 가계부에 대한 우려조차 나오지 않는다. 각 후보는 쓸 돈만 이야기한다. 아동수당, 기초연금 등 유권자의 구미가 당기는 재료가 적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말을 아낄 뿐 아니라 애써 외면한다.
그나마 내놓은 해법은 지출 구조조정이다. 기존 정부 예산을 조정해서 쓰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출 구조조정만큼 국민을 현혹하는 단어는 없다. 재정 당국은 매년 예산을 편성할 때마다 지출 구조조정에 나서겠다고 강조한다. 화수분이 아닌 이상, 지출 구조조정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계가 분명한 지출 구조조정으로는 새 정부 출범 후 발생할 재정지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 가계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선뜻 증세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선택지는 정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의무지출에 대한 재검토다.
의무지출은 법에 근거한 정부 지출이다. 내국세의 20.79%를 자동 편성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지급하는 기초연금 등이 대표적인 의무지출이다. 의무지출은 정부 지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의무지출이 늘어나면 정부가 재량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은 줄어든다.
고령화 등의 영향으로 앞으로 의무지출 비율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재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의무지출에 대한 재검토는 불가피하다. 특히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하지 않는 '낡은 제도'들부터 논의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교육청 예산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교부금은 학생 수가 줄어도 추세적으로 늘어나는 구조다. 내국세에 연동된 탓이다. 개편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이해관계자의 벽에 막혔다. 기초연금은 '노인 70%의 덫'에 빠진 모습이다. 70% 비율을 정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노인도 기초연금을 받고 있다.
새 정부 출범 후 정부 가계부는 급박하게 작성될 전망이다. 내년 세법개정안을 7월 말까지, 본예산을 8월 말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올해도 세수결손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새 정부 출범과 맞물려 쓸 돈은 많아지는 상황이다. 선거 이후엔 분명 '어떻게'가 나와야 한다.
세종=정현수 기자 gustn99@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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