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영씨는 고급스러운 실링왁스 작품도 곧잘 만든다. 장선희 제공 |
“손톱만 한 왁스 조각 6알을 ‘멜팅 스푼’에 담은 뒤 완전히 녹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세요. 1분 남짓 이 순간을 가만히 기다리는 일이 다들 꽤 어려운 것 같아요. 마음이 앞서 성급하게 왁스를 붓고 인장을 찍으면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얻기 힘듭니다.”
지난 9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실링왁스 공방 ‘감성한스푼’. 3년 전부터 이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정인지(38)씨는 “실링왁스는 ‘기다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직접 실링왁스를 해보기로 했다. 정씨의 말대로 왁스가 덜 녹은 상태로 ‘누름판’에 부었더니 금세 굳었다. 다급히 인장을 눌러 찍었더니 원 모양이 찌그러져 버렸다.
왁스를 녹여 자기만의 실링왁스 작품을 만드는 데는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정성을 다해 만든 실링왁스 작품은 행복감을 선사한다. 염서정 스튜디어 어댑터 |
‘봉랍’(封蠟)으로도 불리는 ‘실링왁스’(sealing wax)는 유럽에서 16세기부터 편지와 포장지, 병 등을 봉인하는 데 쓰였다. 당시에는 왁스 색에도 하나하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공적인 서신에는 반드시 붉은색을 사용해야 했고, 부고 같은 부정적인 소식을 전할 때는 검은색을 사용했다. 색깔 양초를 녹여 촛농을 떨어뜨린 뒤, 그 위에 가문의 인장을 눌러 찍었다. 발신인이 누구인지 증명하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열어보지 못하도록 하는 용도였다.
오랜 시간 유럽 귀족들의 상징적인 의식으로 활용되던 실링왁스 작업이 요즘 감성적인 취미 생활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10여년 전 한국에 이미 선보인 취미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레트로 감성의 유행, 속도전이 아닌 ‘느린 삶’을 추구하는 경향 등 새로운 대안 문화가 부상하면서 실링왁스 작업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요즘 실링왁스 작업은 다양한 색감과 모양의 왁스 큐브들을 녹여 다채로운 무늬가 새겨진 인장을 찍어내는 게 특징이다. 왁스, 멜팅 스푼, 라이터, 양초, 실링왁스 워머, 인장 등이 준비물이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실링왁스 키트를 2만원대에 살 수 있다.
`멜팅 스푼\'에 왁스 조각을 올리고 녹이는 과정. 염서정 스튜디어 어댑터 |
실링왁스 준비물. 염서정 스튜디어 어댑터 |
왁스를 녹여 자기만의 실링왁스 작품을 만드는 데는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정성을 다해 만든 실링왁스 작품은 행복감을 선사한다. 염서정 스튜디어 어댑터 |
정씨는 “최근 소중한 사람에게 줄 손편지나 결혼 청첩장을 실링왁스로 꾸미기 위해 공방을 찾는 이가 늘었다”며 “주변인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많지만 그럴수록 편지 등에 더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실링왁스 하나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한가지 색만 사용할 경우, 짧게는 2분 안에도 작품이 완성된다. 하지만 마치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듯, 부분마다 다양한 색을 입히는 작업은 몇시간을 꼬박 들여야 한다. 섬세한 색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칼로 원하는 모양을 조각하듯 잘라내고, 그 위에 또 다른 왁스를 덧입히는 과정을 반복한다. 최근 정씨는 무려 12시간을 들여 손바닥보다 작은 ‘연꽃이 핀 밤 풍경’ 실링왁스 작품을 완성했다.
“이렇게 공들인 뒤 망설임 없이 편지나 엽서에 붙여 소중한 누군가에게 떠나보냅니다. 작은 동전 크기 실링왁스이지만 나의 시간과 정성을 고스란히 담아 선물하는 거죠. 실링왁스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따뜻해지는 취미 생활입니다.”
마음을 전하는 작은 의식
실링왁스 취미에 푹 빠진 윤서영씨가 만든 여러 가지 실링왁스 작품들. 장선희 제공 |
윤서영(44)씨는 고등학생 시절, 소설책을 읽다가 실링왁스를 처음 알게 됐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성껏 편지를 쓴 뒤 양초를 녹여 봉투를 봉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장면이었다. 그 후로 유럽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에서 이런 장면을 읽을 때마다 ‘꼭 직접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윤씨는 “당시에 수소문 끝에 겨우 실링왁스 판매처를 알아냈지만, 재료 가격이 학생 용돈으로 어림도 없었다”며 “10여년 전 대형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실링왁스 재료들을 발견하고 단숨에 가장 즐기는 취미가 됐다”고 말했다. “왁스를 멜팅 스푼 위에서 녹이고, 인장을 찍어보는데 그 옛날 문학소녀 시절이 주르륵 스쳐가는 거예요. 그때 소설 속 주인공들이 이런 과정을 거쳤겠구나, 제 안에 깊숙이 잠들어 있던 ‘감성’이 폭발하는 순간이었죠.”
윤서영씨가 실링왁스를 활용해 만든 근사한 편지지. 장선희 제공 |
실링왁스에 푹 빠져 지내던 윤씨는 4년 전 아예 실링왁스 공방을 차렸다. 실링왁스를 활용해 달고나 간식이나 달걀 모양의 왁스를 만들기도 한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실링왁스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취미 생활이자 오래된 문화”라며 “희귀한 거치대와 멜팅 스푼, 왁스, 인장을 찾으려는 수집가들이 많은 분야”라고 설명했다. 윤씨는 실링왁스 작업 과정을 ‘마음을 전하는 작은 의식’이라고 표현했다. “스마트폰의 ‘전송’ 버튼 한번에 편지도 돈도 모든 것을 보낼 수 있는 시대예요. 그래서 마음을 전하는 일은 더 어렵게 느껴지죠. 공방에 오는 분들이 하나같이 ‘마음을 잘 전하고 싶다’고 하시는 걸 보면요.”
윤서영씨가 만든 특이한 실링왁스 작품. 장선희 제공 |
우연의 아름다움이 주는 기쁨
문구점을 운영하는 임진환(38)씨는 영화가 실링왁스 취미 생활 입문의 계기가 됐다. 임씨는 “‘해리 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에서 실링왁스로 편지를 봉하는 장면을 보고 그 멋스러움에 반했다”며 “국내에 실링왁스가 흔치 않던 몇년 전 외국에서 어렵게 실링왁스 키트를 구해 도전해본 뒤로 인생 취미가 됐다”고 말했다. 임씨는 요즘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왁스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한번 몰입하면 4~5시간씩 걸린다.
임씨가 꼽는 실링왁스의 가장 큰 매력은 ‘우연의 아름다움’이다. 여러 색상의 왁스를 섞어 녹이면 예상하지 못한 오묘한 색이 나오기도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얼마 전에는 무심코 초록과 파랑을 섞어 왁스를 녹였는데, 마치 산과 강을 그린 풍경화처럼 디자인됐다. “한번은 노을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서 무작정 빨강, 흰색, 갈색 등 다양한 색을 내키는 대로 섞었어요. 여러 색이 뒤섞이며 녹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해가 뉘엿뉘엿한 풍경을 새긴 인장을 꾹 눌러 찍었죠. 화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작지만 나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듯한 뿌듯함도 느꼈고요.”
윤서영씨가 만든 다양한 실링왁스 작품. 장선희 제공 |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것도 임씨가 말하는 실링왁스의 매력이다. 인장에 균일한 힘이 가해진다면 기계로 찍은 것처럼 동그랗게 제작되지만, 힘이 조금만 한쪽으로 쏠려도 원 테두리 모양이 달라진다. “그런 못난이들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요. 모양이 정형화되지 않아서 기대하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임씨는 실링왁스를 즐기면서 삶의 모습도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성격이 급한 편이라 처음에는 왁스를 빨리 녹이려고 핀셋으로 스푼을 마구 휘젓기도 했었죠. 서두르다 화로에 왁스를 떨어뜨린 적도 있고요. 이제는 여유 있게 진득하게 기다립니다. 오히려 그 지루한 순간을 즐길 줄 알게 된 거죠.”
실링왁스 취미에 푹 빠진 윤서영씨가 만든 여러 가지 실링왁스 작품들. 장선희 제공 |
실링왁스 취미에 푹 빠진 윤서영씨가 만든 여러 가지 실링왁스 작품들. 장선희 제공 |
팬심 담은 굿즈 제작에도 활용
실링왁스는 아직도 본래 용도처럼 편지에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최근에는 더욱 다양한 용도로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회사원 유승아(45)씨는 최근 실링왁스로 뮤지컬 배우의 ‘굿즈’를 만드는 재미에 빠졌다. 유씨는 “처음에는 팬심을 전달하는 편지를 쓰거나 쇼핑백에 선물을 담은 뒤 봉하는 용도로 실링왁스를 쓰기 시작했다”며 “매번 비슷한 포토카드나 앨범 수집 말고 더 의미 있고 개성 있는 ‘굿즈’를 고민하다가 실링왁스를 활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배우의 얼굴과 뮤지컬 포스터 이미지를 인장으로 맞춤 제작해 실링왁스를 만든 뒤 주변에 기념품으로 나눠주고 있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했던 뮤지컬 작품과 제작 음반,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이미지까지 만들고 있어요. 그 사람의 필모그래피를 나만의 방식으로 의미 있게 간직하는 거죠.”
실링왁스 취미에 푹 빠진 윤서영씨가 만든 여러 가지 실링왁스 작품들. 장선희 제공 |
유씨는 조만간 실링왁스를 소재로 한 유튜브 채널을 만드는 게 목표다. 특히 실링왁스를 녹이고 인장을 눌렀다 뗄 때 나는 특유의 소리를 활용해 사람들에게 힐링을 주는 ‘에이에스엠알’(ASMR) 콘텐츠 제작을 구상 중이다. “제가 좋아서 한 취미 생활일 뿐인데, 받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실링왁스를 소개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제가 간직하고 싶은 어떤 순간, 혹은 모습이 있다면 실링왁스에 한번 담아보세요. 당신의 특별한 순간이 왁스 위에 영원히 머무를 거예요.”
장선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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