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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로드’ 남해 노량해전 승전길 11㎞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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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남해충렬사.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주검이 입관되어 처음 안치됐던 곳에 세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남해충렬사.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주검이 입관되어 처음 안치됐던 곳에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이 막바지로 치닫던 1598년 음력 8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한을 대리한 5대로는 조선에 파병된 왜군 장수들에게 본국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남해안 곳곳에 주둔해 있던 왜군들은 11월15일까지 부산에 집결해서 철수하기로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군 1만4000여명은 1597년 가을부터 전남 순천왜성에 주둔해 있었다. 순천왜성은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 왜군이 한반도 남해안에 쌓은 31개 왜성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전남에서 유일한 왜성이다. 고시니 유키나가군은 순천왜성 북쪽 해안에 전함 500여척을 정박시켜 언제라도 철수할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순천왜성 앞바다에 버틴 조·명 연합 수군에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된 신세였다.



남해충렬사 뒤에 있는 이순신 장군 가묘.

남해충렬사 뒤에 있는 이순신 장군 가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제독 유정에게 바닷길을 이용해 11월10일 부산으로 철수하게 해준다면, 명군에게 순천왜성을 넘겨주겠다며 휴전을 제안했다. 순천에서 부산까지 먼길을 육상으로 철수하는 것은 조선 관군과 의병의 공격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다. 전투보다 협상을 통한 종전을 희망하던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왜군 철수를 지원할 부총병 오광 등 군사 40명을 순천왜성에 파견했다.



명군 도독 진린은 이 정보를 이순신에게 알렸다. 진린 역시 전투보다 협상을 원했지만, 경쟁자인 유정에게 모든 전공을 빼앗길 수 없었다. 조·명 연합 수군은 바다로 철수하는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격멸하기 위해, 500척 규모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11월9일 순천왜성 인근 광양만으로 출전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도 매수하려 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순신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발대로 전함 10여척을 부산에 보내려는 것도 진로를 차단해 허용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결코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남해충렬사 앞바다를 지키는 거북선.

남해충렬사 앞바다를 지키는 거북선.


조·명 연합군은 9월20일부터 6차례에 걸쳐 순천왜성을 점령하기 위한 수륙 합동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육군을 이끄는 유정이 협조하지 않아 수군만 번번이 피해를 봤다.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의 묵인하에 경남 남해군 남해왜성에 주둔한 자신의 사위 소 요시토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상황을 알게 된 왜군들은 일제히 행동에 나섰다. 남해왜성의 소 요시토시,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왜성의 다치바나 무네토라, 부산에 주둔해 있던 테라자와 마사시게와 다치바나 나오쓰구 등이 일제히 수군을 이끌고 순천왜성으로 향했다.



남해충렬사 들머리에는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설치한 척화비도 세워져 있었다.

남해충렬사 들머리에는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설치한 척화비도 세워져 있었다.


조·명 연합 수군은 11월18일 밤 노량해협으로 서둘러 옮겨갔다. 고니시 유키나가군 퇴로를 막은 채 그대로 있다가는 자칫 고니시 유키나가군과 이들을 구하러 오는 왜군 사이에 끼어 협공을 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량해협은 경남 하동군과 남해군 사이 좁은 바다로, 가장 가까운 곳의 간격은 500m도 되지 않는다. 명 수군은 노량해협 서북쪽 하동 쪽에 진을 치고, 조선 수군은 노량해협 서남쪽 남해 쪽에 진을 쳤다. 왜군 구원부대의 앞길을 양쪽에서 미리 막아선 것이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북선 모습의 남해군수협 감암위판장.

거북선 모습의 남해군수협 감암위판장.


11월19일 새벽 조·명 연합 수군 전함 500여척과 왜군 전함 500여척이 좁은 노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렸다. 왜군은 노량해협을 통과하기 위해 명군 전함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이 화포로 공격해 명군을 구한 뒤 왜군 전함을 닥치는대로 격침하자, 왜군은 배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급했던 왜군은 큰바다로 나가는 길로 착각하고 남해 관음포로 후퇴했다. 하지만 막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방향을 돌려 조·명 연합 수군에게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화포를 쏘며 진행되던 전투는 근접전으로 바뀌었고, 결국 백병전으로 이어졌다. 이날 새벽 2시께 시작된 전투는 정오까지 계속됐다.



직접 북채를 쥐고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이순신은 전투가 격렬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덕장과 명군 장수 등자룡 등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순신 승전길’ 노량해전 구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순신 장군 캐릭터.

‘이순신 승전길’ 노량해전 구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순신 장군 캐릭터.


시마즈 요시히로 등 왜군은 이날 오후 50여척의 전함만 이끌고 남해 창선도, 거제 장문포 등을 거쳐 부산으로 철수했다. 조·명 연합 수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11월20일 새벽 고니시군은 순천왜성을 빠져나와 거제를 거쳐 부산으로 달아났다. 부산에 집결한 왜군은 1598년 11월24일부터 11월28일 사이에 모두 본국으로 철수했다. 1592년 음력 4월14일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한·일·중 동북아 3국의 7년 전쟁인 임진왜란은 이렇게 끝났다.



경남도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승전지를 걸으면서 둘러보는 걷기 여행 관광상품인 ‘이순신 승전길’을 선정해서 정비하고 있다. 경남 6개 시·군에 걸쳐 12개 구간으로 이뤄져 있으며, 전체 길이는 159.8㎞에 이른다.



‘이순신 승전길’ 12개 구간 가운데 마지막 구간인 노량해전 구간을 걸었다. 이 구간은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남해충렬사부터 고현면 대사리 대장경판각문화센터까지로, 길이는 11㎞이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바다와 야트막한 언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길이다.



이순신 바다공원에서 바라본 관음포. 관음포는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이 벌어진 격전지이자,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바다이다.

이순신 바다공원에서 바라본 관음포. 관음포는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이 벌어진 격전지이자,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바다이다.


노량해전 구간 출발지인 남해충렬사는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주검이 입관되어 처음 안치됐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주검이 안치됐던 곳에는 현재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남해충렬사에 안치됐던 이순신 장군의 주검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이었던 전남 완도군 고금면 고금도 월송대로 운구됐다가, 1599년 2월11일 그의 고향인 충남 아산시 금성산에 안장됐다. 전사하고 84일만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주검은 1614년 지금의 충남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으로 이장됐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고 30년 뒤인 1628년 남해 선비 김여빈과 고승후는 이순신 장군이 안치됐던 곳에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는 작은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해서 제를 올렸다. 다시 30년이 흐른 1658년 영남어사 민정중은 통제사 정익에게 사당을 신축하게 했다. 1663년 현종 임금은 ‘충렬사’(忠烈祠)라고 적은 어필을 헌액했다. 1721년 조정은 충렬사를 정비하고 노량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노량서원이 철거되면서 남해충렬사도 훼손됐다. 현재의 남해충렬사는 1922년 남해 향사 윤기섭이 중창한 것이다.



관음포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주검을 뭍으로 올려서 처음 눕힌 곳에 세운 사당인 이락사.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곳이라는 뜻으로 ‘이락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관음포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주검을 뭍으로 올려서 처음 눕힌 곳에 세운 사당인 이락사.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곳이라는 뜻으로 ‘이락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남해충렬사 들머리에는 충렬사를 창건한 김여빈·고승후와 중건한 윤기섭을 기리는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또 1871년 흥선대원군이 전국 곳곳에 설치한 척화비도 세워져 있었다. 척화비에는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사당 앞에는 ‘유명 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증시충무 이공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인조는 1643년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이를 기려서 1661년 11월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을 써서 새긴 비이다.



이락사로 가는 숲길. 소나무와 동백이 어우러져 있다.

이락사로 가는 숲길. 소나무와 동백이 어우러져 있다.


남해충렬사 앞바다가 노량해협이다. 남해대교와 노량대교 등 다리 2개가 노량해협을 가로질러 남해군과 하동군을 연결하고 있다. 남해충렬사 앞바다에는 늠름하게 생긴 거북선 1척이 떠있었다. 옛 기록과 전문가 고증을 거쳐 1980년 해군이 복원한 것이다. 해군사관학교에서 전시·관리하다가, 1999년 12월31일 이곳으로 옮겨왔다. 500원을 내면 누구나 들어가서 거북선 내부까지 살펴볼 수 있다.



남해충렬사 주변은 횟집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순신 승전길’은 남해충렬사를 등지고 왼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걸어가면 된다. 도로 안내판과 이순신 장군 캐릭터가 띄엄띄엄 설치돼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남해대교유람선 선착장을 지나서 걸어가면 감암마을이 나온다. 남해군수협 감암위판장이 보이는데, 이 역시 거북선 모습이다.



이순신 바다공원 광장에 있는 상징조형물. 판옥선 위에서 힘차게 지휘하는 이순신 장군의 역동적인 모습과 뒤를 따르는 수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순신 바다공원 광장에 있는 상징조형물. 판옥선 위에서 힘차게 지휘하는 이순신 장군의 역동적인 모습과 뒤를 따르는 수군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계속 걸어가면 이락산을 지나 이순신바다공원이 나온다. 아직 인도가 없는 구간이 많아서, 차로 바깥쪽을 걸어갈 때는 위험을 느끼기도 했다.



이순신바다공원 앞바다가 바로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이 벌어진 격전지이자,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관음포이다. 소나무·동백 숲을 지나 먼저 이락사(李落祠)를 찾았다. 관음포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주검을 뭍으로 올려서 처음 눕혔던 곳에 세운 사당이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곳이라는 뜻으로 ‘이락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락사 입구에는 이순신 장군의 유언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를 새긴 바윗돌이 서있다. 또 1832년 세운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삼도통제사 증의정부 영의정 시충무 이공순신 유허비’라는 긴 이름의 비석도 서있다.



이락사를 지나 숲길을 10분 정도 더 걸어가면 첨망대(瞻望臺)가 나온다. 관음포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1990년 세운 2층 누각이다. 하지만 키 큰 나무들이 앞을 가려서 바다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바다공원에는 식당이 단 1곳 있는데, 중국음식점이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공원에 있는 유일한 식당이 왜 중국음식점일까? 무척이나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순신 바다공원 광장 벽면의 타일 벽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순신 바다공원 광장 벽면의 타일 벽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순신바다공원에서 나와 마지막 목적지인 대장경판각문화센터로 향했다. 도로 공사를 하고 있어서, 걷기 불편한 구간이 있었다.



대장경판각문화센터는 고현면종합복지회관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 국보 3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려 팔만대장경은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데, 남해군 고현면에서 1237년부터 1248년까지 12년 동안 새겼다고 한다. 대장경판각문화센터는 이를 기념하는 시설이다. 대장경 제작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고, 판각 체험 등을 할 수 있었다. 노량해전 전체 구간에서 이순신 장군과 관계없는 유일한 곳인데,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 구하기 위해 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순신 장군의 구국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듯했다.



'노량해전 구간'은 11㎞다. 쉬지않고 계속 걷는다면 3시간이면 되겠다. 중간중간 둘러보고, 밥도 먹고 한다면 반나절 이상 걸릴 터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 태어나서 54살이던 1598년 목숨 바쳐 나라를 구했다. 노량해전 구간을 걸으며 줄곧 생각했다. “나는 54살 때 무엇을 했나? 지금은 무슨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나?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글·사진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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