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 이태희 연구관 |
"흥미로운 점은, 벽난로 앞이나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내 이야기나 내 사정에 대해 말하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향해 말할 때는 두 번이나 자서전적 충동에 사로잡힌 일이 있다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지금--이전 글에서 운 좋게도 몇몇 독자들이 귀 기울여 준 덕분에--나는 또다시 독자의 단추를 붙잡고, 세관에서의 3년간의 경험을 이야기하려 한다."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대표작 <주홍글씨>는 한 세관에서 'A'를 수놓은 천 조각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관은 보스턴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세일럼이란 도시에 있다. 세일럼은 미국 역사에서 잔혹한 마녀재판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1692년부터 이듬해까지 30여 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그중 20명이 죽임을 당했다. 호손의 증조부 존 해손(John Hathorne)은 이때 치안판사로 활동했는데, 혹독한 판결로 "교수형 판사"란 악명을 떨쳤다. 일설에 따르면 호손은 이런 조상과의 인연을 끊고자 성 중간에 'w'를 추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일럼이 마녀재판만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다. 세일럼은 무역항으로 발전해 한 때 미국에서 6번째 큰 도시에 오르기도 했다. 호손의 아버지도 선장으로, 수리남에서 황열병으로 죽었다. 독립전쟁 시 영국으로부터 나포한 대형 선박은 세일럼 발전의 자산이 되었다. 조나단 카른스는 사설 무장 선박을 이끌고 세일럼을 출발, 말레이 제도에서 후추를 싣고 돌아왔다. 미국이 아시아로부터 후추를 대량 수입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700%의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로 알려진 엘리어스 해스켓 더비도 이곳에서 무역 선단을 경영했다. 한때 모리셔스에 기항하는 미국 선박 10척 중 1척이 그의 배였다고 한다. 설탕, 차, 향신료 등이 세일럼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세기 중반 이후 대형 선박이 등장하면서 무역의 중심은 수심이 깊고 대형 항만을 갖춘 보스턴과 뉴욕으로 이동했다. 과거의 번영을 상징하는 세일럼의 옛 건축물은 오늘까지 남아 미국의 국립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되었다. <주홍글씨>의 첫 무대인 세관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계적인 무역항으로서 기억을 가장 생생하게 품고 있는 곳은 피바디에섹스박물관이다. 피바디에섹스박물관은 세일럼의 선주와 선원으로 이루어진 동인도해상협회(East India Marine Society)의 부속 기구로 출발해 현재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미술품 및 인류학 자료 84만여 점을 소장한 미국 대표 박물관이 되었다.
1893년 보빙사 일원으로 미국에 간 유길준은 세일럼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첫 하숙집이 바로 피바디에섹스박물관 관장이었던 에드워드 S. 모스의 집이었다. 모스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훗날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박물관을 위해 한국 자료도 수집했는데, 그중에는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 때 대한제국이 출품한 악기도 있다. 모스는 물심양면으로 유길준을 도왔고 유길준은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때문이었는지 유길준은 갖고 온 물건을 피바디에섹스박물관에 기증했다.
지난 17일 국립중앙박물관의 지원으로 피바디에섹스박물관 "유길준 한국실(Yu Kil-Chun Gallery of Korean Art and Culture)"이 문을 열었다. 전시는 유길준 기증품뿐 아니라 백남준 등 현대 작가의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박물관'을 소개하며 "천하 각국의 고금 물산을 크기나 귀천 관계없이 모두 수집하여 사람의 견문과 지식을 넓히고자 설치한 것"이라고 했다. 이제 그의 물건은 미국에 남아 우리 문화의 견문과 지식을 넓히는 촉매로서 세일럼 역사의 한 장을 펼치고 있다.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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