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당시 불법 체포된 뒤 고문 당했던 강택심씨가 22일 부축을 받으며 사법연수원에 마련된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서보미 기자 |
“저는 결코 빨갱이가 아닙니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명예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22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사법연수원에 마련된 형사모의법정. 가슴에서 꺼낸 글을 천천히 읽던 강택심(92살) 할아버지는 ‘명예’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한참을 흐느꼈다. 아버지 뒤를 지키던 아들도 함께 울었다. 백발 피고인의 간절한 바람대로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부장판사 노현미)는 “너무나 긴 통한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이 피고인의 억울함을 푸는 작은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는 재판부를 향해 강 할아버지는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다. 76년 만에 열린 재심재판에서 ‘빨갱이 도와준 죄’를 벗는 순간이었다.
1948년 제주4·3 당시 중산간 마을인 애월읍 금덕리에 살던 그는 겨우 16살이었다. 토벌대가 불태운 마을을 떠나 외가에서 지내다 “산간 폭도들을 도와줬다”는 이웃의 모함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도망가라” 하고는 뒤에서 총을 쏘았다고 한다. 아들도 “일본군이 버리고 간 총알을 주워다 빨갱이에게 줬다”는 이웃의 거짓말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석달간 소 힘줄로 만든 채찍과 몽둥이로 매일 맞았다. 1949년 어느 날 갑자기 풀려나고 나서야 제주지법이 내란방조죄 등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석방됐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숨을 제대로 쉬지도, 잘 듣지도 못했다. 그래도 이듬해 6·25전쟁이 터지자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입대했고, 다리에 포탄을 맞았다. 겨우 살아남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4·3 빨갱이 전과자’라는 낙인으로 탈락했다. 그 뒤 육지로 올라가 평생을 살았다. “제주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
뒤늦게라도 명예를 되찾아준 재판부와 검찰에게 강 할아버지는 감사하다고 했다. 이날 재심은 강 할아버지가 아니라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합수단)의 청구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합수단은 2021년 개정된 제주4·3특별법에 따라 불법 군사재판·일반재판을 받아 4·3희생자로 결정된 수형인을 대상으로 직권재심을 청구했고, 4·3전담재판부는 대부분 무죄를 선고해왔다. 아직 희생자 결정이 나지 않은 군사재판·일반재판 생존수형인을 위해서도 합수단과 재판부는 특별법이 아닌 형사소송법에 따른 직권재심 절차를 밟아왔다. 지금까지 군사재판 수형인 총 1711명, 일반재판 수형인 총 262명이 무죄를 선고 받았다.
특히 강 할아버지는 아직 희생자 결정이 안 난 ‘일반재판 생존수형인’이 무죄를 선고받은 첫 사례다. 오랫동안 제주를 떠나있던 강 할아버지는 희생자 신청과 재심 청구 절차를 잘 몰랐다고 한다.
합수단은 고령의 강 할아버지가 생전에 억울함을 풀 수 있게 거주지인 서울을 찾아 당시 불법 구금과 체포, 고문, 가혹행위가 이뤄졌다는 진술을 듣고 직권재심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비행기를 타기 힘든 강 할아버지를 위해 출장 재판을 결정했고, 사법연수원은 처음으로 일선 재판부에 공간을 내줬다. 직권재심을 위한 출장 재판은 지난해 부산에 이어 두 번째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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