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루이스 고시오, ‘진정한 사랑은 결국 당신을 찾을 것이다’(2021). 사고로 시각을 잃은 작가가 안내견 런던이와 손잡고 동행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작가와 안내견의 몸이 뒤바뀌며 경계의 벽을 허물었다. 부산현대미술관 기획전에 나왔다. /허윤희 기자 |
#1. 부산현대미술관 1층 전시장 말미. 사람과 강아지가 손잡고 서 있는 조각이 놓였다. 교통사고로 시각을 잃은 미국 작가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의 작품이다. 한 점 빛도 볼 수 없게 된 그는 안내견 런던이와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몸이 뒤바뀌는 상상을 했다. 박한나 학예연구사는 “시각장애인에게 안내견은 파트너이자 자신의 눈과 같다”며 “안내견의 신체를 빌려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위계, 장애라는 벽이 허물어지길 바라는 소망을 갖고 만든 작업”이라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입구 계단에 형형색색 의자가 들어섰다. 농인 건축가 리처드 도허티의 작품 ‘농인 공간: 입을 맞추는 의자’다. /연합뉴스 |
#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입구. 관람객들이 오가는 야외 계단에 형형색색 의자가 들어섰다. 농인 건축가 리처드 도허티의 작품 ‘농인 공간: 입을 맞추는 의자’다. 누구나 마주보고 앉아 쉬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출입구인 계단에 의자가 놓이면서 미술관을 오가는 사람들은 계단 대신 측면 경사로를 이용해야 한다. 장애인의 시선에서 공간을 다시 살펴보도록 만든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다양한 조건의 몸을 포용하는 기획전이 부산·서울·광주 국공립 미술관에서 잇따라 개막했다. 장애를 가진 작가들의 작품부터 장애가 있는 이들을 돌보고, 몸과 감각의 다양성을 조명하는 작품들을 방대하게 선보인다.
뇌출혈 이후 왼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라움콘(Q레이터, 송지은)의 ‘한 손 프로젝트’. 한 손으로 쉽게 쓸 수 있게 디자인한 도구들이다. /허윤희 기자 |
부산현대미술관은 ‘배리어 프리(Barrier-Free·무장애)’를 표방하는 국제 기획전 ‘열 개의 눈’을 지난 3일 개막했다. 전시 제목은 손가락 열 개를 두 눈에 비유한 은유다. 신체 감각이 고정된 게 아니라 나이·상황·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강승완 관장은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접근성’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함께하는 사회를 예술을 통해 상상해보길 제안하는 전시”라고 했다. 국내외 장애·비장애 작가 20명이 다양한 감각을 사용해 만든 작품 70여 점으로 구성됐다.
엄정순, '당신의 눈동자를 보는 망원경'(2025). 부산현대미술관 제작 지원. /부산현대미술관 |
엄정순, '당신의 눈동자를 보는 망원경'(2025). 망원경 안에 유리 구슬 등 반짝이는 이물질을 넣어 렌즈를 덮었다. /부산현대미술관 |
작가 엄정순은 망원경 안에 유리 구슬처럼 반짝이는 이물질을 넣어 렌즈를 덮었다. 화려하게 빛나지만 시야가 차단된 망원경을 통해 ‘본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 뇌출혈 이후 왼손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라움콘의 ‘한 손 프로젝트’, 초점이 어긋난 일본 시각장애인 사진가의 사진에 재즈 음악을 입힌 정연두의 영상 작품 등이 나왔다. 9월 7일까지. 무료.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 전시 전경. 김은설 작품 '흐려지는 소리, 남겨진 소리'가 설치된 모습이다. /국립현대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선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가 16일 개막했다. 건강한 몸은 물론 장애가 있는 몸, 나이 든 몸, 아픈 몸 등 다양한 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캐나다 출신 작가 판테하 아바레시의 ‘사물 욕망’은 장애인의 몸도 욕망을 느끼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김은설은 반투명한 벽에서 흐릿하게 소리가 나오는 영상을 통해 구화인(입술 모양을 보고 소통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각을 표현했다. 국내외 작가 15인(팀)의 작품 40여 점을 7월 20일까지 볼 수 있다. 관람료 2000원.
송예슬, '아슬아슬'(2025). 인터랙티브 설치, 가변크기.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작 지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선 관객 참여형 전시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가 열리고 있다. 무장애, 장애 예술, 참여 예술을 연구해 온 국내외 작가 5인(팀)이 다른 사람의 감각을 상상해 보라고 제안한다. 송예슬은 신체적 조건이 다른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관객 참여 작품을 내놨다. 참여자들은 장대를 함께 들고 말없이 눈빛과 호흡만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 6월 29일까지, 무료.
김원영, ‘보철(물)로서 움직이기-머신/어포던스/케어’(2025). /국립현대미술관 |
국공립 미술관 세 곳에서 일제히 비슷한 기획전을 내놓은 건 ‘접근성과 다양성’을 내세우는 세계 박물관·미술관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국제박물관협회(ICOM)는 2022년 개정된 박물관의 정의에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는 과제를 포함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박물관·미술관이 다양한 몸을 맞이하는 공공의 장소로서 변화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고, 강승완 부산현대미술관장은 “세계 미술관이 지향하는 접근성의 가치를 접목해 미래의 미술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실천적 첫걸음”이라고 했다.
[부산=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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